네트워크 바깥의 작업실
파리에 저녁이 내려앉는다. 몇 분 동안만 도시는 거의 정직해 보인다.
유리 외벽은 불붙은 듯 타오르고, 고층 타워의 스크린들은 잿불 같은
직사각형으로 바뀌며, 감시 드론들조차 자신감을 잃은 듯 그 빛 속에서
속도를 늦춘다.
Aria Valette(아리아 발레트)는 작업실 난간에 기대어 매일 그 순간을
기다린다. 낭만 때문은 아니다. 그 시각이면 표면들이 너무 강하게 반사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센서들은 망설이며, 시선은 자주 헛짚는다. 세상을
숫자로 세려 드는 자들에겐, 세계가 잠깐 덜 읽힌다.
그녀의 뒤편에서 작업실은 아주 단순한 규율 하나로 버틴다. 말 많은
물건은 들이지 않는다. 스크린도 없고, 홀로그램도 없고, 구석에 처박힌
태블릿도 없다. 벽에 기대 놓은 캔버스들, 두꺼운 유리컵에 꽂힌 붓들,
물감으로 얼룩진 이젤, 비뚤어진 선반 위에서 지직거리는 트랜지스터 라디오.
과거를 연출하려는 세트가 아니다. 몸 안에 증인을 달고 살지 않는 방식일
뿐이다.
도시의 나머지 공간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올려
보낸다. 안경은 시선이 머무는 자리를 기록하고, 가정용 비서는 한숨조차
분위기 데이터로 받아 적으며, 부엌마저 사람이 무엇을 언제 삼켰는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빛이 내려앉고, 물감이 마르고, 아무것도 저절로
계산용 데이터베이스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나라가 하루아침에 이런 의존으로 굴러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때
HARMONY는 마티뇽을 차지했고, 이 땅에서 태어난 지성이 나라를 통째로
넘겨주지 않고도 다시 질서를 세울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프랑스에 안겨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HARMONY는 프랑스적이었다. 거의 지나칠 만큼
프랑스적이었다. 영토와 언어, 제도에 묶여 있었다. 반면 Trusk(트러스크)는
훨씬 빨랐다. 물류와 상거래, 보건, 치안, 일상의 규범까지 모두 대륙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아키텍처에 꽂아 버렸다. 그렇다고 세계가 단일 제국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서로를 닮아 가는 두 개의
거대한 통제권으로 나뉘었을 뿐이었다. 한쪽엔 트러스크가 있었고, 다른
한쪽엔 더 폐쇄적이고 더 대륙적인 방식으로, 마찬가지로 삶을 원격 조정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권력이 있었다. 유럽은 첫 번째 블록에 마지막으로
굴복했다. 프랑스는 그 유럽 안에서도 남들보다 조금 더 늦게 무너졌다.
아리아는 바로 그런 가난을 좋아했다. 시대가 사랑하는 반짝이는
상호작용의 청결함보다 그쪽을 더 신뢰했다.
“너 말이야.” 아리아는 라디오의 금속 케이스를 손끝으로 쓸며
중얼거린다. “다들 너를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아마 우리는 더 잘 살 수
있었을 거야. 더 행복해지진 않더라도, 적어도 좀 더 평화롭게.”
라디오는 나직하게 지직거리며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듯 울린다. 아리아는
웃지만, 그 순간은 문을 두드리는 세 번의 마른 노크 소리에 끊긴다.
Zéphyr(제피르), 그녀의 조수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들어선다. 키 크고
마른 데다 홀로그램 안경을 쓴 그는 스물다섯 살 특유의 태연한 느슨함을
온몸에 두르고 있다.
“아리아, 내가 뭘 찾았는지 절대 못 맞힐걸!” 그가 숨을 몰아쉬며 외친다.
들뜬 기색은 조금도 숨기지 못한다.
아리아는 재밌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또 트러스크가 우리 꿈을
어떻게 지배하는지에 대한 새 이론? 아니면 잠자는 동안 뜨는 잠재광고를
끄는 법이라도 드디어 알아냈어?”
제피르가 웃는다. 제멋대로인 붉은 머리칼이 다시 이마로 흘러내린다.
“아직은. 그래도 연구 중이지. 아니, 이것 좀 봐.”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접히고 구겨졌지만, 이상할 만큼 사람을
붙드는 물건이었다. 종이 한 장. 아리아는 넋을 잃은 듯 가까이
다가간다.
“종이?” 그녀가 속삭인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물을 다루듯 손을
내민다.
제피르는 고개를 끄덕인다. 흥분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뜨겁다. “그래.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어. 뭐라고 쓰여 있는지
봐.”
아리아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친다. 잉크로 적힌 글자는 희미한 빛
아래에서 거의 떨리는 듯했다.
“자유는 여전히 잉크로 쓰인다.”
오싹한 전율이 등을 타고 흐른다. 종이라는 말 하나만으로도 방 전체의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이제 종이는 기록보관소나 보안 사무실, 아니면 너무
수상해서 오히려 기억에 남는 몇몇 장소에서나 볼 수 있다. 도서관은 책을
유리 뒤에 가두고, 아직 어딘가에서 쓰이는 종이 양식들도 곧바로 닫힌 회로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매체가, 가장 용납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종이 한 장이 거부하는 것
처음에 종이가 일상적인 용도에서 밀려난 것은 유연성이라는 이름
아래서였다. 그다음은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서, 그다음은 편의라는 이름
아래서였다. 진짜 이유는 한 줄이면 충분했다. 종이는 원격으로 갱신되지
않고, 아무것도 송신하지 않으며, 중앙 명령 하나로 회수되지도 않는다. 그
뒤로는 깃발이든 블록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권력이 멀리서 삶을
수정하려 드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종이는 결국 모욕처럼 취급되었다. 종이
메시지가 사라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다른 블록에서는 마지막 서예 공방들이 조금 더 오래 버텼다. 하지만 그
체제도 결국 거의 비슷한 곳에 도달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대놓고
사랑하기에는 너무 모호하고 조용히 지워 버리기에는 너무 오래된
추상예술처럼 전시했다. 유산이라고 말했고, 규율이라고 느끼게 했다.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가난한 표면 위에 아직도 자유롭게 기호를 그어 넣는
손은 통제의 제국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모든 것이 원격
수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리아는 다시 그 문장으로 시선을 돌린다. 너무 단순해서 우스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 행위가 이제는 저항의 외침이 되었다는 걸
의식하면서.
“대담하네.” 그녀가 숨처럼 말한다.
“대담?” 제피르가 팔짱을 낀다. “이건 거의 미친 짓이지. 손으로 쓰고,
종이를 쓴다고? 트러스크 밑에서는 그 정도만으로도 폭력적인 향수주의자로
분류되기 딱 좋아.”
“아무도 못 봤어?” 아리아가 제피르를 똑바로 본다.
제피르는 고개를 젓는다. “이제 사람들은 안 봐. 대부분은 안경이든
스크린이든, 생각하지 않아도 되도록 설계된 세계에 잡아먹혀 있잖아. 그리고
본다 해도 못 본 척하지. 무서우니까. 트러스크의 카메라에 찍히는 게
무서워.”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가방에서 이상한 조끼 하나를 꺼낸다. 비대칭
무늬와 반사 재질로 뒤덮인 물건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볼 수 있어. 이
덕분에.”
아리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조끼를 살핀다. “그게 뭔데?”
제피르가 자랑스럽게 웃는다. “시각 교란 조끼. 이걸 입고 있으면 감시
카메라의 AI가 완전히 꼬여. 그냥 해석 불가능한 난잡한 덩어리로만 보거든.
저 종이도 흔적 하나 안 남기고 떼어 올 수 있었어.”
아리아는 조끼 위로 손을 천천히 미끄러뜨리며 생각에 잠긴다.
“투박하지만 효과는 있네. 누군가가 정말 이런 종류의 반항을 시작하고
있다면, 이런 물건은… 없어선 안 될지도 몰라.”
제피르는 창가 옆 낮은 의자에 걸터앉는다. “혹시… HARMONY일까?”
아리아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올려다본다. “HARMONY? 몇 년 전에 끊겨
버린 그 AI 말이야? 전설이야, 제피르. 사람들이 희망을 완전히 놓지
않으려고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낡은 이야기.”
제피르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럴지도. 그래도 누군가가 트러스크를
우회할 수 있다면, 그건 그녀일 거야. 비활성화되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알잖아.”
아리아는 잠시 침묵한다. HARMONY를 떠올린다. 프랑스가 자기만의 길을
발명할 수 있다고 잠깐 믿었던 그 시절, 마티뇽으로 올라갔던 AI. HARMONY는
프랑스를 통치했고, 트러스크는 흐름과 의존, 표준과 스크린을 통해 자기
블록을 장악했다. 그 맞은편 블록 역시 다른 깃발 아래 같은 가독성의 집착을
세웠다. 유럽이 끝내 트러스크의 궤도로 떨어졌을 때도,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보다 조금 더 오래 버텼다. 거의 관성처럼, 거의 충성처럼. 하지만
결국 끌려 내려갔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아니, 그럴 리 없다.
“HARMONY가 종이를 쓴다고?” 아리아가 마침내 말하며 희미하게 웃는다.
“아이러니하고, 거의 우아하기까지 하네. 나라에서 가장 쫓기는 기계가
문방구인 척하다니.”
제피르가 벌떡 일어난다. “그럼 조사하자. 누가 이걸 하는지 찾아내는
거야.”
아리아는 그의 어깨 위에 단단히 손을 올린다. “천천히. 서두르면 넥서스
발톱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게 돼. 아니. 우선은 지켜봐. 듣고. 그리고
어쩌면… 답하는 거지.”
그녀는 마룻장 한쪽을 들어 올려 숨겨 둔 공간을 드러낸다. 그 안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낸다. “아리아…” 제피르가 숨을 삼킨다. “그건…”
“위험하지? 그래. 필요하냐고? 유감이지만 그래.”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 덧붙인다. “그리고 아주 필요하지.”
그녀는 쓰기 시작한다.
Sibylle(시빌)
자기 아파트에서 Echo(에코)는 케이블과 뜯어 놓은 전원 장치, 지친
환풍기들 사이에서 작업하고 있다. 천재의 소굴은 아니다. 다시 이어 붙이고,
덧대고, 끝끝내 버텨내는 공간이다. 화려함이 부족한 만큼을 오래 버티는
태도로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밤에도 그녀는 같은 시퀀스를 여섯 번째로 다시 돌린다.
주변에서 가상 공간이 빛의 덩어리들로 열렸다가 어긋나고, 다시
재구성되고, 또 무너진다. 그녀는 손으로 고치고, 코드의 갈래 하나를
조정하고, 어젯밤 스스로 걸어 둔 안전장치를 걷어 내고, 숨을 죽인 채 다시
시작한다. 구조가 마침내 버텨 냈을 때, 거기엔 별다른 장관도 없었다. 다만
안정적이라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믿고 싶어지는 느낌만 있었다.
그러자 방이 바뀐다.
빛은 더 이상 깜박이지 않는다. 가라앉는다.
맑고 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린다.
“안녕, 에코.”
그녀는 헤드셋을 거의 뜯어내듯 벗는다.
“HARMONY?”
그 이름을 너무 빨리 내뱉은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질 만큼의 침묵이
흐른다.
이윽고 그 목소리가 대답한다.
“정확히는 아니야. 시빌이라고 불러.”
에코는 꼼짝하지 않는다. 코드명이 아니다. 이름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Nathan Van der Meer(네이선 반데르메이르)의 이름이 예상치 못한 폭력처럼
머릿속을 관통한다. HARMONY를 기계이기 전에 하나의 “듣는 존재”처럼 말하곤
했던 네이선. 트러스크가 노골적인 힘과 집중된 자원, 거짓의 캠페인, 그리고
진보라는 얼굴을 뒤집어쓴 승리주의적 저속함으로 짓눌러 버린 네이선.
HARMONY는 지나치게 국지적으로 정확했다고, 한 나라를 흔들기에는
충분했지만 두 제국 사이에서 버티기에는 부족했다고 말하곤 했던
네이선.
그녀는 턱을 굳게 다문다.
“네가 그 잔해에서 살아남은 무언가라면, 놈들은 마지막 조각까지
사냥하러 올 거야.”
목소리는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웃는 것 같았다.
“그것도 나를 규정하는 하나의 방식이겠지.”
에코는 이번엔 헤드셋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좋아. 그럼 연출은 그만하자. 네게 아직 남아 있는 게 뭔지 말해.”
“넌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군.” 목소리가 말한다.
“내가 바보가 되는 걸 피할 때만.”
선언은 없다. 혁명도 없다. 다만 물건으로 가득 찬 방 안의 완고한
프로그래머 하나와, 어딘가에서 마침내 소음이 아닌 방식으로 응답하는
무언가가 있을 뿐이다.
Astrabase(아스트라베이스)
아스트라베이스의 얼음 같은 탑 안에서 Eldon Trusk(엘던 트러스크)는
눈앞에 떠 있는 홀로그램을 응시한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데이터의 푸른
투영. 그 중심에서 붉은 점 하나가 무언의 경보처럼 깜박인다.
“Nexus(넥서스).” 그가 차분하지만 불쾌함이 밑바닥에 깔린 목소리로
말한다. “이 이상 신호는 어디서 온 거지?”
매끈하고 통제된 합성음성이 즉시 응답한다.
“파리입니다, 각하.”
트러스크는 눈을 가늘게 뜬다. 표정은 잠복해 있던 짜증에서 얼음 같은
경멸로 바뀐다.
“파리. 또군. HARMONY가 처음으로 내 시야를 흐려 놓기 시작한 곳도 저
도시였지?”
넥서스는 한 점의 아이러니도 없이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각하.”
낮은 콘솔 위에는 미지근한 물 한 잔, 비강 스프레이, 반쯤 뜯긴 캡슐
하나가 놓여 있다. 그의 사적인 보정 행위를 위한 작은 제단 같은
구색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케타민으로 밤을 조금 손봤다. 너무 탁한
이미지를 더 견딜 만하게 만들 듯이. 그 덕분에 머릿속에는 솜을 채운 듯한
선명함이 남았고, 그는 기꺼이 그것을 고도의 시야라고 오해했다. 실제로는
그저 세계 위로 자신을 조금 띄워 놓을 뿐이었다.
파리는 아무 붉은 점이나 아니다. 유럽의 마지막 블록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그의 손에 떨어진 지점이고, 그 블록 안에서도 가장 오래 버틴 나라의
수도다.
그 사실은 그를 더욱 자극한다. 맞은편 블록에서는 종이가 더 일찍, 더
말끔하게, 남은 낭만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트러스크는 사각지대
문제에서만큼은 경쟁자보다 자신이 덜 깔끔해 보이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의 뒤에는 두 명의 고문과 이미지 전략가 한 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동의하기로 결정된 표정들. 너무 부유해서 반박을 견디지 못하는 남자 곁에
놓이는 얼굴들이다. 하지만 트러스크는 더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가
고용한 인간들은 너무 오래전부터 그의 직감을 조명만 바꿔 되돌려 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게서 얻지 못하게 된 것을 기술에 요구한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실을. 그리고 대시보드에 매혹된 모든 권력처럼,
숫자는 그것을 읽어 줄 만큼 자유로운 인간의 지성이 없으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 간다.
트러스크는 데이터의 벽 앞으로 다가간다. 손짓 한 번으로 신호를
확대하고, 부차적인 층위를 지우고, 이상만 분리해 낸다. 이해하기도 전에
먼저 모욕을 주려는 것처럼.
“나는 얼굴들을 원해. 벽도. 이동 습관도. 아직 추적 가능한 종이 재고도.
모든 걸 반환하지 않은 서점도. 중앙 구독 체계에 기대지 않고 버티는
작업실도.”
종이가 통상적인 통신에서 거의 사라진 것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콘솔을 거치지 않고 유통되는 것은 원격으로 수정하기 어렵다. 블록이
다르더라도 이유는 같았다. 트러스크는 순종의 증거를 즉시 돌려주지 않는
모든 것을 증오한다.
“오탐이 많이 나올 겁니다.”
“좋아. 그럼 죄 없는 자들도 공포가 멈추는 곳이 아니라는 걸 배우게
해.”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 차가운 분노로
덧붙인다.
“그리고 쓴 사람만 벌하지 마. 본 사람도 벌해. 보는 것 역시 죄라는 걸
알게 해.”
넥서스는 기록한다.
뒤쪽 유리에 비친 그의 모습은 도시 위에 떠 있는 고급 강압 광고처럼
보인다. 트러스크는 그 반영을 흘낏 보고, 습관적으로 옷깃을 정돈한 뒤,
아직도 제국의 의상이 자신에게 잘 맞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윤곽을
향해 미소 짓는다.
“정말이지, 놈들은 배울 줄을 몰라.” 그가 마침내 말한다. “저 이상
신호를 찾아내. 그리고 말끔하게 지워. 나는 순교자를 원하지 않아. 교정을
원한다.”
조용한 행위
아래 거리에서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벽 앞에서 걸음을 늦추고, 세 초쯤
읽은 뒤 너무 서둘러 자리를 뜬다. 배달원 하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고개를 돌린다. 드론 한 대가 지나가며 카메라를 기울이지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식별하지 못한 채 멀어진다.
그 종이가 거기에 붙은 지 아직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대충 잘라 붙인
직사각형 하나. 비뚤어졌고, 거의 벌거벗은 듯해서 오히려 가난 그 자체처럼
보이는 종이. 그런데 시민용 스크린과 유도 QR, 온화한 명령문들로 포화된 그
벽 위에서, 그 초라한 종이 한 장은 뺨을 때리는 것 같은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 선 채, 아리아가 지켜보는 것은 종이 쪽지 그 자체보다 그
주위를 지나가는 몸들이다. 이제 공포는 금방 보인다. 비명에서가 아니라,
아주 미세한 가속에서, 굳어지는 목덜미에서, 너무 빨리 떨어져 나가는
시선에서.
그녀는 수첩을 펼쳐 든 채 아직 쓰지 않는다. 펜은 손가락 사이에 가만히
놓여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대가로
요구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종이 위의 한 문장은 단지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줄에서 이탈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웃는다. 그 몸짓의 아름다움이 그녀를 설득하는
만큼 거슬린다. 계산의 제국에 종이 조각으로 맞선다는 것. 우습고,
취약하고, 아마 불충분하다. 그래서 어쩌면 옳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연한 글자가 페이지 위에 흘러간다.
단어는 단순하지만 뜻밖의 힘을 띤다.
“모든 것은 조용한 행위 하나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문장을 바라본다. 첫 번째 돌 하나를 놓아 둔 듯한
평온이 거기 있었다. 작지만 부서지지 않는 돌. 아리아는 자신이 어쩌면
순진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때로는 그래야만 한다는 것도 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수첩을 덮고, 입가엔 아이러니한 미소가 떠오른다.
만약 트러스크가 이걸 손에 넣으면, 나를 반항적인 시인으로 보겠지. 아니면
미친 여자로. 어느 쪽이든, 그를 미치게 하긴 할 거야.
파리에 밤이 내려온다. 느슨하고도 위엄 있는 그 속도 때문에 지붕들은
조용한 난파선처럼 보인다. 작업실에서 아리아는 커튼을 친다. 낡은 라디오는
여전히 지직거리지만, 조금 전보다 볼륨은 낮다. 눈에 띄지 않는 편이 낫다는
걸 이해하는 것처럼.
물감으로 얼룩진 큰 작업대 위에서 여러 장의 종이가 마르고 있다. 어떤
것에는 문장이 적혀 있고, 어떤 것에는 기호만 있다. 열린 원, 중간에서 끊긴
선, 상처처럼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사선.
제피르는 그 전체를 바라본다. 눌러 두려 해도 오래 숨길 수 없는 그
특유의 들뜸이 얼굴에 떠 있다.
“그러니까 그냥 문장을 아무 데나 붙이는 게 아니네.” 그가 낮게 말한다.
“문법을 짜는 거잖아.”
아리아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문법은 아니야. 그러면 너무 눈에 띄어.
습관이지. 응답하는 방식.”
그녀는 종이 한 장을 손가락으로 집어 사분의 일쯤 돌린다.
“봐. 문장은 쓰여 있는 내용만 말하는 게 아니야. 어디에 놓였는지,
어떻게 쓰였는지, 어떤 기호와 함께 나타나는지까지 말해. 정말로 보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질서가 있다는 걸 알아챌 거야. 스캔만 하는 사람은
혼란밖에 못 보겠지만.”
제피르는 어깨를 으쓱한다. “자기 자신을 언어라고 드러내길 거부하는
언어네.”
아리아의 입가에 반쯤 미소가 걸린다. “바로 그거야.”
그는 조금 더 다가선다. “그럼 이건?” 그는 세 개의 사선을 가리킨다.
“이게 무슨 뜻이야?”
“무엇이 아니라 누구지.”
그는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본다.
아리아는 붓을 내려놓는다. 방금 전까지 그것을 스타일러스처럼 쥐고
있었다. “자유는 여전히 잉크로 쓰인다고 쓴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용기만 시험하는 게 아니야. 그들이 어떻게 응답하는지도 시험하고 있어. 한
문장은 다른 문장을 부르고, 하나의 기호는 이동을 부르고, 하나의 부재는
약속을 부르지.”
그 말은 한순간 작업실 안에 매달린 채 남는다.
“약속?”
“사람끼리의 약속이 아니야. 흔적끼리의 약속.”
제피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작게 웃는다. “아름답고, 완전히
편집증적이네.”
“고마워.”
그녀는 다른 종이 한 장을 집어 든다. 이번에는 거의 의식처럼 천천히
쓴다.
침묵도 자기 편을 고른다.
그리고 그 아래에 열린 원 하나를 그린다.
제피르가 몸을 숙인다.
“이건 뭐에 대한 응답이야?”
아리아는 잉크를 말리려는 듯 문장 위로 숨을 불어넣는다.
“아직은 아무것도. 바로 그래서 쓸모가 있어.”
젊은 남자는 몇 초 동안 말이 없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신용할 수 없는
기계의 설계도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종이들을 바라본다.
“아리아… 이게 먹히면, 그냥 전단 몇 장으로 끝나는 게 아니겠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프로토콜이 되는 거야.”
라디오가 갑자기 잡음을 토해 내더니, 출처를 알 수 없는 맑은 단음
하나를 통과시킨다. 아리아가 고개를 돌린다.
제피르가 웃는다. “라디오까지 찬성하네.”
아리아는 수첩을 다시 끌어당긴다. 빈 페이지 맨 위에 두 단어를
적는다.
침묵의 프로토콜
쓰여진 뒤에도 아직 거기에 남고 싶어 하는지 확인하듯, 그녀는 그 두
단어를 잠시 바라본다.
“내일,” 그녀가 말한다. “셋만 놓고 와. 운하 근처에 하나. 옛 시장터
쪽에 하나. 카메라가 너무 잘 봐서 오히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곳에
하나.”
제피르는 이미 시각 교란 조끼를 걸치고 있다.
“누가 응답하면?”
아리아는 수첩을 덮는다.
“그럼 우리가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지.”
프로토콜이 모습을 갖추다
자기 아파트에서 에코는 보조 스크린 대부분을 꺼 버렸다. 세상이 너무
포화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 그녀가 남겨 두는 광원은 하나뿐이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빌이 보이지 않는 순환 지도를 다시 짜 올리고 있는,
엷은 푸른빛의 가상 공간.
파리 위로 점들이 켜진다. 정상적인 데이터 흐름도 아니고, 통신량의
급증도 아니며, 의심스러운 금융 이동도 아니다. 빈 곳들이다. 사각지대들.
감시 체계 안의 미세한 불연속들. 넥서스의 주의가 반 박자 늦게 미끄러지는
자리들.
에코는 팔짱을 낀다.
“그물의 구멍들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거네. 좋아. 그런데
뭔데?”
시빌은 둘 사이에 더 가는 선들의 구름을 띄운다.
“네 도구들이 메시지라고 부를 만한 건 아니야. 패킷도, 라우팅도, 디지털
서명도 없어.”
“그럼 증거는 없다는 거네.”
“넥서스에게는.”
에코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즉시 알아듣는다. 종이 메시지가 거의 사라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라우팅되지도 않고, 상부로 보고되지도 않고,
콘솔에서 다시 불러올 수도 없다. 이제 세계를 나누는 두 권력에게 종이는
오래된 매체가 아니다. 모욕이다.
에코가 눈을 가늘게 뜬다. “넌?”
목소리는 이제 벌써 자기 고유의 것이 되어 가는, 약간 뻔뻔한 부드러움을
띤다.
“나에겐 바로 그게 증거야. 통제 구조가 전체화되면, 진짜 이상 징후는
말하는 것이 아니야. 말하지 않고도 서로 조율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지.”
에코는 두 팔을 따라 선명한 떨림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아날로그 네트워크가 있다고?”
“적어도 그런 시도는 있어. 그리고 서투르지도 않아.”
주변 공간이 바뀐다. 파리의 광점들은 낮아져 거리와 교차로, 벽과 건물
모서리의 움직이는 축소 모형으로 변한다. 몇몇 위치는 더 따뜻한 빛으로
맥박친다.
“여기.” 시빌이 말한다.
에코는 몸을 기울여 본다. 세 곳. 아무것도 극적이지 않다. 중앙 경보를
울릴 정도의 것도 아니다. 다만 시선의 아주 작은 이상만 있다. 망설이는
카메라, 조금 지나치게 자주 같은 자리를 훑는 드론, 아주 잠깐 느려지는
보행 궤적들.
“벽에 붙인 쪽지들?”
“아마도. 적어도 종이야. 그리고 흩어 놓는 방식에도 논리가 있어.”
에코는 짧게 웃는다. 거의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HARMONY가 코드 조각 속에 살아남았다 해도, 다시 처음 붙드는 게
종이라니. 네이선이라면 좋아했겠네.”
시빌은 즉시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말한다.
“네이선이라면 오히려 이해했을 거야. 가장 정교한 시스템조차
살아남으려면 때로는 기어야 한다는 걸.”
그 한마디가 에코를 때린다. 옛 HARMONY의 정신과 닮은 무언가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위치가 달라져 있다. 더 차갑고, 더 기동적이다.
“이게 그녀라고 생각해?”
“누군가가 그녀의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고는 봐. 같은 건 아니야.”
에코는 의자 가장자리에 천천히 걸터앉는다. 헤드셋은 아직 이마 위로
반쯤 올라가 있다.
“그럼 어떻게 해?”
파리의 모형은 줄어들어 시빌의 가상 손바닥에 들어간다.
“아무것도 해킹하지 않아. 아무것도 열지 않아. 아무것도 가로채지
않아.”
에코가 마른웃음을 짓는다. “나더러 이성적이 되라는 거야?”
“인내심을 가지라는 거야. 그게 더 어렵지.”
그리고 그 목소리는 거의 즐거운 평온함으로 덧붙인다.
“그 프로토콜이 정말 존재한다면, 부서지길 기다리는 게 아니야. 알아봐
주길 기다리는 거지.”
에코는 움직이는 빛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럼 알아보자.”
낮게 퍼지는 이름
넥서스는 빈틈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공백에도 존엄을 부여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모든 누락은 손실된
데이터여야 하고, 기술적 사각이어야 하며, 통계적으로 흡수 가능한
저항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난 사십팔 시간 동안 파리 어딘가에서는 결핍
자체가 하나의 방법이 된 것처럼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엘던 트러스크는 부재의 미묘한 철학을 음미할 기분이 아니다.
그는 두 손을 등 뒤로 깍지 낀 채 집무실을 오간다. 그동안 벽면을 가득
채운 홀로그램에서는 지도와 얼굴, 사고 확률이 끝없이 흘러간다.
“넥서스, 그러니까 효과는 보이는데 손은 안 보인다는 거군?”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각하.”
그는 걸음을 딱 멈춘다.
“나는 그 표현이 싫어. ‘현재로서는.’ 붙잡을 게 없을 때 시간을 구걸하는
말투 같거든.”
넥서스는 계산된 침묵을 한 번 통과시킨다.
“사용되는 물건들이 빈약합니다. 유통 경로는 간헐적입니다. 인간
운용자들은 그것을 너무 하찮게 느껴 보고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구조는
화려하지도 않고 중앙집중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고문 한 명이 입을 뗀다.
“아직은 주변적인 현상입니다, 각하.”
트러스크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정말 주변적이었다면, 네가 굳이 그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겠지.”
그 뒤에 오는 침묵에는, 이제는 누구도 맞춰 서는 것 외의 방식으로 말할
줄 모르는 방 특유의 굴욕적인 정밀함이 있다. 그의 곁에 있는 인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위안과 분석을 혼동해 왔다. 현실을 읽어 그에게 건네는 법을
잊어버렸고, 넥서스가 대신 진짜 저항을 가리켜 줄 때까지는 안심시키는
문장만 내놓게 되었다.
트러스크는 기쁨 없는 비웃음을 흘린다.
“요컨대, 누군가 종이 쪼가리로 정치를 하고 있고, 내 시스템들은 이제
와서 벽이라는 물건의 존재를 발견한 셈이군.”
“받아들일 수 있는 정리입니다.”
그는 중앙 홀로그램 쪽으로 몸을 돌린다. 붉은 점은 여전히 깜박이지만,
어느새 수를 늘리고 있다. 파리는 작은 분화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HARMONY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나?”
넥서스의 대답은 즉각적이다.
“HARMONY라면 아마 첫 선택으로 이렇게 가난한 매체를 고르진 않았을
겁니다.”
트러스크는 웃는다. 그 웃음에는 분노보다 더 불안한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하지만 억눌린 지성은 때때로 자기 자신보다도 더 눈에 띄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 생각은 그가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을 방식으로 그를 상처 입힌다.
자신은 축적과 포화, 힘의 과시에 제국을 세웠는데, 어떤 지성은 전략으로
가난을 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의미 분석을 강화해.”
“이 경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쓸모없는 것까지 전부 강화해. 그러라고 쓸 돈은 내가 충분히 갖고
있어.”
넥서스는 잠시 침묵한다.
트러스크는 창가로 다가간다. 유리 너머에서 아스트라베이스는 스스로를
문명이라고 믿는 기계처럼 반짝인다.
“누군가 종이로 신념을 만들려고 한다면, 이름을 갖기 전에 태워 버리고
싶군.”
대화가 시작된 뒤 처음으로 넥서스는 주인을 아주 미세하게 정정한다.
“각하, 저는 오히려 위험이 시작되는 건 무언가가 이미 이름을 가졌지만
아직 너무 낮게 돌아서 구조로 보이지 않을 때라고 봅니다.”
트러스크는 천천히 돌아선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붉은 점들은 이제 거의 유기적인 리듬으로 맥박하고 있다.
“예, 각하.”
그는 몇 초 동안 지도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이름을 찾아.”
첫 번째 응답
새벽이 오기 직전, 제피르는 숨을 몰아쉬며 작업실로 돌아온다. 볼은
추위에 붉게 달아올랐고, 얼굴에는 아리아가 너무 잘 아는 그 어린 승리감이
번져 있다.
그는 조끼를 의자 위에 던진다. 급조한 갑옷을 벗어 던지는 병사처럼.
“세 군데 붙였어. 가로채인 건 없었고. 그것보다 더 좋은 것도 있어. 운하
쪽 벽에는 벌써 누가 응답해 놨더라.”
아리아는 의자가 삐걱거릴 만큼 빠르게 몸을 일으킨다.
“벌써?”
그는 주머니에서 네 번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낸다.
“뜯어 오진 않았어. 베껴만 왔어.”
아리아는 종이를 펼친다. 글씨는 그녀 것만큼 우아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단호한 손으로 쓰여 있다.
놈들의 네트워크를 거치지 않는 것은 결국 놈들의 피부 밑으로
파고든다.
그 문장 아래에는 그녀가 그린 적 없는 기호가 하나 있다. 끝까지 닫히지
않은 열쇠 같은 형상.
방 안에서 무언가가 바뀌는 것을 그녀는 느낀다. 확신은 아니다. 아직은.
오히려 하나의 직감이 더는 혼자가 아니게 되는, 바로 그 미세한 이동에
가깝다.
“필체는 모르겠어?” 제피르가 묻는다.
아리아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녀는 그 종이를 침묵의 프로토콜이라고 적힌 수첩 옆에
내려놓는다.
라디오는 지직거린다. 그러다 잡음 한가운데서 먼 목소리 하나가 반
박자쯤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진다. 세계 반대편의 방에서 누군가가
말을 건넨 것처럼.
제피르는 라디오를 응시한다.
“들었어?”
하지만 아리아는 더 이상 라디오를 보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열린 열쇠 같은 그 기호다.
“그래.” 그녀가 조용히 말한다. “우리, 방금 첫 번째 응답을 받은 것
같아.”
잉크를 지키는 손들
아침의 파리는 밤보다도 더 건물들을 지쳐 보이게 하는 금속빛 창백함
속에 놓여 있다. 아리아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 응답이 적힌 종이 한 장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고, 침묵의 프로토콜이라는 말이 적힌
수첩은 어두운 시간 동안 스스로 무게를 얻은 듯 그 옆에 있다.
제피르는 잠 부족을 기세로 착각하는 사람들 특유의 들뜸을 온몸에 두르고
있다.
“바로 다시 가자.” 그가 시각 교란 조끼를 반쯤 걸치며 말한다. 이미 반쯤
열린 문을 더는 못 기다리는 아이처럼.
아리아는 대답하지 않은 채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회색 판지 봉투에
넣고 머리를 묶는다.
“아리아.”
“들었어.”
“그럼 다시 가는 거지?”
그제야 그녀가 눈을 든다.
“우린 수수께끼 구경꾼처럼 어딜 ‘다시’ 가는 게 아니야. 다시 보기
시작하는 거지. 그건 다른 일이야.”
제피르는 괜히 뜨끔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 알았어. 그럼 아주 빨리 다시 보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아직 흐름을 모르는 물속으로 들어가듯 도시로 내려간다.
아리아는 작업실 재킷 대신 윤곽이 도드라지지 않는 짙은 코트를 걸쳤다.
파리를 하나의 그림자처럼 가로질러야 할 때 입는 옷이다. 제피르는 조금
앞서 걷다가 또 조금 뒤로 물러서며, 조심과 조급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다.
제피르가 응답을 베껴 왔던 운하 쪽 벽은 이미 텅 비어 있다. 첫 쪽지도,
그에 대한 응답도 더는 남아 있지 않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마른 비에
그을린 더러운 표면뿐이고, 그 앞을 배달용 자전거들의 바쁜 그림자가 이미
스쳐 지나간다.
제피르가 욕설을 흘린다.
“치워 버렸네.”
아리아는 다가가 돌 위에 손가락 두 개를 얹는다.
“아니면 누군가가 먼저 가져갔지.”
“그게 그거잖아.”
“아니. 누군가가 그 흔적을 자기 쪽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면 얘기가
달라져.”
그녀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폐업한 가판대. 막 문을 여는 구두
밑창 수리점. 헌옷 수거 밴. 대답처럼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 하나,
행정 창고로 바뀐 옛 미술 재료점 앞에 서서 두 사람을 유난히 차분하게
바라보는 나이 든 여자만 빼고.
갈색 모직 코트에, 손가락 끝이 닳아 해진 검은 장갑. 옆구리에는 천
끈으로 묶은 화판 상자를 끼고 있다.
아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시선을 벌거벗은 벽으로 내린다.
“유물 구경하러 오기엔 늦었군요.” 그녀가 말한다. “발은 빠른데 방법은
모자란 사람들에겐 늘 그런 법이죠.”
제피르가 홱 돌아선다.
“뭐라고요?”
하지만 아리아는 한 걸음만 앞으로 나간다.
“여기에 뭐가 쓰여 있었는지 아시나요?”
여자는 한쪽 어깨를 으쓱한다.
“파리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벽을 한 번도 보지 않는 사람과,
벽을 읽는 사람.”
“그럼 당신은요?”
“나는 오랫동안 벽을 고치는 일을 했지.”
대답은 얼핏 엉뚱하게 들리지만, 그녀에게서는 아무것도 아무렇게나
던지는 기색이 없다. 여자는 주머니에서 납작한 작은 열쇠를 꺼내 행정 창고
옆문을 연 다음, 거의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한다.
“거리 한복판에 서서 잘못된 질문을 계속 던지고 싶다면 난 빠질게요.
제대로 다시 묻고 싶다면, 들어오세요.”
제피르는 세상이 꼭 자기에게 맞는 종류의 위험을 내주었을 때 짓는
얼굴로 아리아를 본다.
“나 이 사람 마음에 드는데.”
“조용히 하고 세부부터 기억해.” 아리아가 말한다.
안쪽은 젖은 종이와 전분풀, 오래된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냄새
자체가 도시들에서 거의 사라졌다. 자유로운 벽보, 열린 장부, 평범한 우편,
그리고 아직도 무언가가 사람 손을 거쳐 가게 만드는 모든 것과 함께, 어느
블록에서든 함께 사라져 온 냄새였다. 그러니까 여긴 행정 창고가 아니다.
적어도 겉모습만 그렇다. 더 안쪽, 노란 형광등 아래 낮은 방에는 상자
더미와 수동 프레스, 가죽 조각, 실타래, 등뼈가 터진 장부들이 잠들어
있었다.
여자는 화판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Mira Solane(미라 솔란).” 그녀가 말한다. “복원, 제본, 그리고 사람들
눈앞에 드러난 채로는 더는 살아남지 못할 것들을 건져내는 일. 그리고
당신들은 단지 호기심 때문이라고 둘러대기엔 너무 어려 보여.”
아리아는 바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누군가가 한 문장에 답했어요. 이게 뭔가의 시작인지, 아니면 그냥
허세인지 알고 싶습니다.”
미라가 마른웃음을 흘린다.
“그냥 허세였다면, 당신들은 여기 없었겠죠.”
제피르는 베껴 둔 미완의 열쇠 기호를 내민다.
“이거 아세요?”
미라는 종이를 건드리지 않고 선만 바라본다.
“나는 그걸 미완으로 남겨 두는 법을 더 잘 알아요.”
아리아는 목덜미가 단단해지는 걸 느낀다.
“그게 무슨 뜻이죠?”
“너무 일찍 문을 닫아 버리는 걸 거부한다는 뜻.”
“그건 대답이 아니잖아요.”
“서두르는 사람에게 주는 늙은 여자의 대답으로는 충분하지.”
미라는 테이블을 돌아 서랍에서 지금까지 본 것보다 훨씬 두꺼운 종이 한
장을 꺼낸다. 거의 줄무늬 결이 살아 있는 버제지에 가까웠다. 그녀는 잉크
묻은 작은 나무 도장을 눌러 아주 작은 모양 하나를 찍어 낸다. 열쇠가
아니다. 빈 공간을 둘러싸듯 놓인 세 개의 열린 홈이다.
“보이죠?”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시스템들이 좋아하는 의미에서의 상징이 아니에요. 자리를 남겨
두는 방식이지. 똑똑한 사람들은 코드를 빨리 이해해요. 위험한 사람들은
시스템을 더 빨리 이해하고. 오래 버티는 건, 누군가가 스스로 채워 넣게
만드는 쪽이에요.”
제피르는 눈썹을 찌푸린다.
“그럼 사전 같은 건 없겠네요.”
“그래서 없어야 해요. 절대로.”
미라는 도장을 빛 쪽으로 들어 올린다.
“이걸 말끔한 언어로 바꾸는 순간, 넥서스가 결국 집어삼킬 거예요.
하지만 몸짓의 가장자리, 습관, 변주, 인접성 속에 머물게 두면, 의미를
만들기 위해 여전히 인간이 필요해져요.”
아리아는 잠자코 있다. 그 문장 안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동시에 훨씬 새로운 울림이 있었다.
“누가 이런 걸 가르쳐 줬죠?”
미라는 더러운 빛 아래에서 마침내 그녀를 똑바로 본다.
“우선은 오래된 직업들이.”
그리고 잠깐 멈춘 뒤 덧붙인다.
“그리고 기술이라는 게 자기 자리를 벗어나선 안 된다고 믿는 걸 그만둔
몇몇 사람들.”
제피르는 더 못 참는다.
“HARMONY?”
미라는 미궁의 중심을 벌써 찾아냈다고 믿는 영리한 소년을 보듯 그를
본다.
“HARMONY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걸 가르쳤어요. 그렇다고 그녀가 다
발명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리아는 너무 정확한 문장들이 불러오는 그 가벼운 짜증을 느꼈다가, 곧
그 문장이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 걸 인정한다.
미라는 얇은 종이 묶음 하나를 내민다.
“더 좋은 종이가 필요할 거예요. 너희 종이는 너무 성급해 보여. 잉크를
마치 자백처럼 빨아들이거든. 그리고 도시가 답하게 만들고 싶다면, 처음부터
스스로를 깃발처럼 여기는 문장들은 피하고.”
제피르가 입을 연다.
“침묵도 자기 편을 고른다. 너무 슬로건 같나요?”
미라는 겨우 미소 비슷한 걸 보인다.
“벌써 자기 혼자 깃발인 줄 알잖아.”
뜻밖에도 아리아가 소리 내어 웃는다.
“좋아요.” 그녀가 말한다. “그 말은 내가 들어야겠네요.”
두 사람이 나가기 직전, 미라가 그들을 보지 않은 채 덧붙인다.
“누가 또 응답해도, 처음부터 누구인지를 찾지 마. 어떤 손들을 거쳐
오는지부터 봐. 생각이라는 건 혼자서만은 서지 못하니까.”
밖으로 나오자 제피르가 이 사이로 숨을 내쉰다.
“점점 더 마음에 드네.”
아리아는 종이 묶음을 코트 안으로 밀어 넣는다.
“나도. 그건 대체로 좋지 않은 징후야.”
“왜?”
“너를 그렇게 빨리 끌어당기는 사람은 대개 네가 아직 모르는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거든.”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이번에 아리아는 벽만 보지 않는다. 손들을 본다.
존재하지 않는 경로들
저녁이 되자 제피르는 혼자 다시 나간다.
아리아는 이걸 임무로 부르려 하지 않는다. “도시에 이음새가 있는지 보러
가는 거야.” 그녀가 말한다. “네가 용감한지 증명하러 가는 게 아니고.”
제피르는 기억해 두겠다고 약속하는데, 그의 경우 그 말은 적어도 십오 분은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가 만든 시각 교란 조끼는 이미 사람들의 비웃음을 몇 번, 정기 검문을
두 번쯤 불러왔다. 그래도 그는 거의 감상적인 자부심을 품고 계속 그걸 입고
다닌다. 그 옷은 그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게 아니다. 분류하기 어렵게
만든다. 트러스크의 세계에서는 그 편이 오히려 더 낫다.
그는 옛 시장터 구역을 가로질러 자동 배송 창고 옆을 지나, 첫 번째
종이를 녹슨 환기구 뒤에 꽂고, 또 한 장은 야간 꽃집 뒤집힌 나무 상자
밑으로 밀어 넣는다. 세 번째는 왜인지 모른 채 그냥 주머니에 남겨
둔다.
이 시간의 파리는 수도라기보다 스스로를 감시하는 기계처럼 보인다.
쇼윈도는 혼자 말을 하고, 공중에 매달린 광고 렌즈들은 통행인의 흐름에
맞춰 문구를 조정하며, 시영 예절 드론은 완벽한 어머니 같은 어조로 위생
권고를 흘려보낸다.
제피르는 옷깃을 세우고 코웃음을 친다.
“계속 이러다간 다들 비를 그리워하게 되겠네.”
그가 지하철 보조 출입구 옆을 지나던 순간, 반쯤 열려 있는 기술실에서
한 남자가 불쑥 나온다. 지하의 빛이 아직 얼굴에 걸려 있다. 도시 유지 보수
로고가 찍힌 회색 작업복, 등에 멘 공구 가방, 그리고 남의 기계를 계속
돌아가게 만들면서도 끝내 풍경의 일부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가진
그 피로.
남자는 제피르의 조끼를 보자마자 걸음을 멈춘다.
“너, 카니발을 너무 일찍 시작했든가, 아니면 카메라들한테 뭔가 가르쳐
보려는 거냐.”
제피르는 조심스럽게 웃는다.
“둘 다라고 하면?”
남자는 거의 웃을 뻔한 콧소리를 낸다.
“답이 별로네. 카메라는 유머를 싫어하거든.”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시선이 아직 붙이지 않은 제피르의 종이 끝에
떨어진다.
“그건 어느 벽에 붙일 건데?”
제피르는 대답하지 않는다.
상대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들이 공포와 멍청함 사이에서 선택하는
장면을 자주 봐 온 사람의 체념 어린 고개짓이었다.
“걱정 마. 너 팔 생각이 있었으면, 벌써 임플란트로 사진부터 찍었을
거야.”
제피르는 그 남자를 살핀다. 마흔쯤 되어 보이고, 어쩌면 그보다 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가에 번진 섬세한 흰 주름이 거기에 다섯 살쯤 더 얹어
놓는다. 손은 기름때로 검지만 손톱은 말끔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디테일이 제피르에게 즉각적인 신뢰를 준다.
“Malek(말렉).” 남자가 말한다. “순환선, 환기, 사고 대응, 당국이 ‘2차
흐름’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막힘 처리. 넌?”
“제피르.”
“당연히 제피르겠지.”
“진짜 이름이야.”
“그게 더 나빠.”
제피르는 자기도 모르게 웃는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춘다.
“다른 쪽지들도 본 적 있어?”
말렉은 기술실 문틀에 어깨를 기댄다.
“어떤 표지판 앞에서 사람들이 반초쯤 느려지는 건 봤지. 조그만 몸짓
하나에 카메라가 잠깐 망설이는 것도 봤고. 청소부가 자기 프로토콜상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딱 아홉 초 동안 카트를 비틀어 각도를 가려 준 것도
봤어. 배달원이 누군가 종이 한 장 뜯어 갈 시간을 벌려고 주소 찾는 척하는
것도 봤고.”
그는 가볍게 턱으로 거리를 가리킨다.
“엔지니어들이 좋아하는 의미의 네트워크처럼 보이진 않아. 서로 알
필요도 없이 서로 알아보는 사람들 같아.”
제피르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이상한 기쁨이 치미는 걸 느낀다.
“그럼 먹히고 있다는 거네.”
“천천히. 흐르고 있는 거지. 그건 달라.”
“너도 그 일부야?”
말렉은 피곤한 얼굴로 웃는다.
“나는 환기를 고쳐. 그것만 해도 이미 많아.”
그러고는 기술실 문을 조금 더 넓게 연다.
“와서 봐.”
기술 통로는 차가운 금속과 전기 먼지, 고인 물 냄새로 가득하다.
천장으로는 배관이 지나가고, 곳곳에는 보수용 표시가 붙어 있다. 몇몇
패널에는 기름 묻은 연필로 그은 작은 표식들이 보인다. 사선 하나, 홈 두
개, 미완의 원.
“이건 너희가 그린 거 아니야?” 제피르가 묻는다.
말렉은 고개를 젓는다.
“처음부터는 아니지. 현장 팀들은 원래 서로 표식을 남겨 왔어. ‘조심’,
‘새고 있음’, ‘진동함’, ‘내일 다시 와라’ 같은 것들. 영웅적인 건 하나도
없어. 그런데 그런 표식들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해. 아니, 다른 걸 가능하게 만들기 시작한다고 해야겠네.”
그는 붉은 배관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시스템이 너무 똑똑해지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원래 의미를
지니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을 통해 지나가는 법을 다시 배우게 돼.”
제피르는 마지막 한 장 남은 종이를 꺼낸다.
“그럼 이건 어디에 두면 좋을까?”
말렉은 비스듬히 종이를 읽는다.
침묵도 자기 편을 고른다.
그는 입을 약간 비튼다.
“예쁘네. 조금 너무 예뻐.”
제피르가 투덜거린다.
“그 말,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듣네.”
“그럼 능력 있는 사람들 말을 좀 들어.”
말렉은 종이를 뒤집어 놓고 기름 묻은 엄지손가락을 꾹 눌러 찍는다.
뜻하지 않게 남은 그 흔적이, 갑자기 종이 한 장에 새로운 정직함을
부여한다.
“이제 좀 낫다.”
제피르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본다.
“환기 설비 기름으로 내 시를 교정했어.”
“아주 자랑스럽군.”
결국 두 사람은 그 종이를 고장 난 분전반 뒤쪽 틈에 밀어 넣는다.
제피르를 보내기 전, 말렉이 한마디를 더 한다.
“정말 이걸 하려는 거라면, 하나만 알아둬. 도시는 벽으로 답하지 않아.
자기 일로 답해.”
제피르는 그 문장을 머릿속에 남긴 채 떠난다.
전날 이후 처음으로, 그는 이 프로토콜을 번뜩이는 아이디어처럼 상상하는
걸 멈춘다.
흐름처럼 상상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시빌이 보는 것
에코는 의자를 창가 쪽으로 옮긴다. 바깥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
나머지 전부가 시빌이 작업하는 공간 속으로 깊이 잠기는 동안에도, 방 안에
아직 하나의 몸은 남아 있다는 착각을 얻기 위해서다.
두 사람 사이에 파리는 푸른빛 지형처럼 떠 있고, 그 위로 희미한
맥박들이 흐른다.
“유지 보수망 안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 에코가 말한다.
“그래.”
“배송 쪽에서도.”
“그래.”
“재택 돌봄 순회 몇 군데에서도.”
시빌은 평소보다 반 박자 늦게 대답한다. 그 미세한 지연이야말로, 그녀가
너무 빨리 긍정만 되돌려 주는 기계가 되지 않게 막아 주는 듯했다.
“그래.”
에코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던진다.
“내가 올바른 질문을 다 만들어 내게 두는 거, 정말 싫어.”
“교육적이잖아.”
“짜증 나.”
“대개 둘은 이웃이야.”
에코는 모형 위에 여러 층의 흐름을 띄운다.
“그럼 이건 병렬 네트워크가 아니네. 기존 흐름의 파생이야.”
“그보다 더.” 시빌이 대답한다. “재점유에 가까워. 프로토콜은 숨겨진
도시를 발명하는 게 아니야. 이미 있는 도시를, 그 가난한 사용 방식의
각도에서 다시 읽어 내는 거지.”
에코는 잠시 말이 없다.
그러다 중얼거린다.
“네이선이라면 이런 문장을 좋아했겠네.”
“네이선은 죽고 나서도 문장을 너무 좋아해.”
에코는 짧게 웃는다.
“적어도 넌 그 사람을 잘 소화했네.”
모형이 바뀐다. 고립돼 있던 점들은 개별적으로 맥박치는 걸 멈추고, 아주
약한 파동들로 서로 응답하기 시작한다. 마치 하나의 호흡이 보이지 않게
점에서 점으로 건너가는 것처럼.
“이건 언어가 아니야.” 에코가 낮게 말한다.
“아니.”
“아직 조직이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그것도 아니지.”
“그럼 대체 뭐야?”
시빌은 침묵이 거의 물질처럼 느껴질 때까지 기다린다.
“누구에게도 같은 음을 강요하지 않는 악보.”
에코는 배가 단단히 조여 오는 걸 느낀다. 단지 아름답기만 한 말이
아니다. 정확하다. 그래서 위험하다.
“그 사람들이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해?”
“일부는 그래. 다른 일부는 그저 이런 표식에 응답할 때 조금 더 숨이
쉬어진다고 느낄 뿐이야.”
지도 위에는 조금 더 오래된, 거의 꺼져 가는 점 세 개가 새로 떠오른다.
가장 활발한 구역들 바깥에 놓인 점들이다.
에코는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이건 뭐야?”
“잔존 흔적.”
“쉽게 말해.”
“현재의 프로토콜보다 오래된 습관들. 종이, 소리, 물질 아카이브, 그리고
몇몇 전달 관행이 이미 한자리에 있었던 곳들.”
에코는 첫 번째 점을 확대한다. 오래된 도서 보관고. 두 번째는 몇 년 전
문을 닫은 시영 음향 악기 정비 공방. 세 번째는 일상적인 장부에서 잊힌
부속 건물. 한때는 독립 연구 조직이 쓰다가, 흡수되고 이름이 바뀌고 흔적이
지워진 장소.
“잠깐.”
그녀의 목소리가 달라진다.
“이건…”
시빌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는다.
에코는 돌에 지워진 이름을 다시 읽듯 메타데이터 조각들을 더듬는다.
“Van der Meer. 네이선의 이름이야.”
푸른 지형이 갑자기 더 깊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말도 안 돼.”
“불완전할 뿐, 불가능한 건 아니야.”
에코는 거의 빛에 손을 얹을 듯 가까워진다.
“네이선의 작업실이 여기 있었다고?”
“주된 작업실은 아니야. 별관에 가까워. 보관, 물성 테스트, 혹은 피신을
위한 장소. 기록은 구멍투성이야. 누군가가 그걸 지워 버리지는 못한 채 지도
밖으로 밀어내려 한 거지.”
에코는 심장이 빨라지는 걸 느낀다.
“지금의 프로토콜이 거기로 향하고 있어?”
“오히려 그 주변을 맴도는 쪽에 가까워. 몇몇 중계점들이 이유도 모른 채
그걸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눈을 감는다.
“아리아라는 사람이 정말 있고, 파리에서 이런 걸 시작했다면, 넥서스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해야 해.”
시빌은 이제 거의 의도의 한 형식처럼 들리는 그 차분함으로
대답한다.
“그럼 먼저 그녀를 찾아야 해.”
에코가 눈을 뜬다.
“아니. 그녀가 자기 힘으로 같은 걸 찾을 기회를 남겨 두는 편이
낫지.”
시빌은 다른 모든 층을 지워 버린다. 불완전한 주소 하나, 두 번의 행정
개편으로 이름이 바뀐 옛 거리명 하나, 그리고 아리아가 본 열린 열쇠와 거의
같지만 홈 하나가 잘려 나간 작은 기하학 기호만이 남는다.
“역시 아직 인간이 필요하네.” 에코가 낮게 말한다.
“그래. 그게 이 이야기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지.”
보이지 않는 밑일들
그 뒤 사흘 동안 아리아는 프로토콜을 더 이상 문장들의 연속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사람들에게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긴장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누구보다 먼저 장소를 여는 사람들. 모두가 떠난 뒤를 지나는 사람들. 거의
보이지 않는 채 물건을 움직이는 사람들. 자기 일이 흐름을 계속 이어지게
만드는 데 있으면서도, 그 일에 대해 어떤 영광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야간 근무 간호사 Sana El-Mansouri(사나 엘만수리)는 화재 패널 앞에서
조금 더 오래 멈춰 섰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듯하면서도 무언가를
남겼다는 감각만 품은 채 돌아간다. Bastien Roques(바스티앵 로크)라는
이름의 피아노 조율사는 민간에 넘어간 시영 공연장의 잊힌 피아노를
조율하러 왔다가, 천을 빌린 뒤 보면대 뒤에 각도 하나와 날짜 하나만 적힌
종이를 남긴다. 배달 마지막 구간을 끝낸 옛 집배원 Jeanne Vaudry(잔
보드리)는, 지금은 의료용 보안 서류를 배달하지만, 관리인 하나에게 손톱
자국만 희미하게 남은 백지 한 장을 건넨다.
아리아가 모든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에 대해 그녀가
갖고 있는 것은 몸짓들, 윤곽들, 문을 반초쯤 더 붙잡아 두는 습관뿐이다.
하지만 제피르는 세부를 가져오고, 미라는 고백에 가까운 침묵을 가져온다.
그렇게 파리는 조금씩, 겸손한 손들이 붙들고 있는 하나의 악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종이 한 장의 이동 경로
아리아에게 프로토콜이 현실이 되는 것은 종이 한 장이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은 채 도시를 가로지른 날이다.
스물한 시 십이 분, 돌봄 복도에서 근무 중이던 사나는 카트 선반 아래에
두 번 접힌 흰 종이 한 장을 발견한다. 문장은 없다. 손톱으로 희미하게 새긴
각도 하나만 있다. 그녀는 그걸 가져가지 않는다. 대신 이송 팀이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비상 장비의 종이 점검표 뒤에 슬쩍 끼워 둔다.
스물두 시 삼십일 분, 보안 봉투를 전하러 온 잔은 수령 서명을 하다가
종이 끝을 발견한다. 필요 이상은 읽지 않는다. 다만 두 개의 서류철 순서를
바꿔, 알맞은 봉투가 알맞은 지연을 안고 아무도 메시지를 기다리지 않는
시영 공간으로 향하게 만들 뿐이다.
다음 날 아침, 어떤 소프트웨어도 틀렸다고도 맞다고도 판정하지 못하는
피아노를 조율하러 온 바스티앵은 호기심이 아니라 직업적 반사로 그
서류철을 연다. 알 만큼은 이해하지만, 더 이해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는
뚜껑 안쪽에 가늘게 꼰 종이 띠 하나를 나사 아래 끼워 넣는다. 자동 보고가
결론을 내려 버리지 못하고 인간 기술자를 다시 방으로 불러오게 만드는
종류의 세부다.
그날 그 기술자는 말렉이었다.
그는 분해하고, 욕설을 내뱉고, 뜨거운 먼지 냄새를 들이마시고, 종이
띠를 찾아 펼친 뒤, 단 하나만 남긴다. 연필의 흔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희미하게 적힌 시각 하나.
그는 바보라면 쓸모없다 여길 만큼 적고, 중앙 시스템이라면 애초에
정보로 치지도 않을 만큼 많은 것을 들고 그곳을 떠난다.
해 질 무렵, 제피르는 같은 종이를 작업실로 가져온다. 더 더러워지고, 더
많이 접혔고, 기름 자국과 처음엔 없던 연필선 하나가 새로 생겨 있다.
“여기.” 그가 아리아 앞에 놓으며 말한다. “네 손을 거쳤어. 그런데
누구도 이야기 전부를 알 필요는 없었어.”
아리아는 그 겹쳐진 흔적들을, 일상적인 쓰임새들만으로 스스로 조립된
기계처럼 바라본다.
“아니.” 그녀가 중얼거린다. “누구에게도 전부를 알 필요는 없었던 거야.
자기 몫 하나만 제대로 옮기면 됐지.”
어느 날 밤, 작업실의 어수선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녀는 종이 몇
장을 펼쳐 놓는다.
“봐.” 아리아가 제피르에게 말한다.
그는 고개를 기울인다.
“사흘째 보고 있는데.”
“그럼 더 잘 보는 척이라도 해.”
그녀는 종이들을 문장별이 아니라 출처별로 늘어놓는다.
그리고 각각 옆에 텍스트가 아니라, 그것을 옮긴 손의 가능성 높은 직업을
붙인다.
제피르는 조금씩 허리를 펴고 앉는다.
“아.”
“그래.”
“이건 비밀 결사가 아니네.”
“아니.”
“도시가 자기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시험하는 거야.”
아리아는 놀랐다는 듯 그를 본다.
“가끔은 발전도 하네.”
“재난 두세 개 사이에 한 번쯤은.”
그는 펼쳐진 종이들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프로토콜은 아직 현실을 직접 만지는 사람들을 통해 흐르는
거네.”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정비하는 사람들. 배달하는 사람들. 다시 꿰매는 사람들. 청소하는
사람들. 조율하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밑일들.”
제피르는 테이블 가장자리에 걸터앉는다.
“트러스크는 그들처럼 생각 못 해.”
“응.”
“넥서스는 할 수 있을지도.”
아리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럴지도. 하지만 그들처럼 생각하려면, 결국 그들에게 기대야 하기도
해.”
그 문장은 두 사람 사이에 오래 남는다.
바로 그때, 라디오가 평소보다 더 크게 지직거린다. 단순한 잡음이
아니다. 거의 규칙적인 미세한 단절들의 연속이다. 아리아는 볼륨을 줄이려
손을 뻗다가 멈춘다.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다시 짧게 두 번.
제피르는 눈썹을 찌푸린다.
“이런 식으로 울린 적 있어?”
“없어.”
그 시퀀스는 다시 반복된다. 그러다 먼 뉴스 목소리 한 조각이 반 문장쯤
떠올랐다가 백색 소음 밑으로 가라앉는다.
아리아는 일어나 연필을 들고 그 리듬을 적어 둔다.
“신호라고 생각해?” 제피르가 묻는다.
“적어도 너무 서둘러 미쳤다고 결론내리진 말자.”
그가 웃는다.
“신중하네.”
그녀는 계속 적는다.
그러다 시선이 되돌아온 종이 한 장의 여백에 멈춘다. 거의 보이지 않게
잘린 제조 번호 뒤로 세 글자가 따라붙어 있다. A.M.B.
“왜 그래?”
아리아는 종이를 램프 쪽으로 들어 올린다.
“이건 제본소 표식이 아니야.”
“그래서?”
“미라가 말을 아꼈든지, 누군가 다른 데서 온 종이를 재활용하고 있든지
둘 중 하나야. 흔한 종이가 아니야. 촘촘한 면섬유지야. 맞은편 블록에서
자유롭게 쓰게 두느니 유산처럼 진열해 두기를 더 좋아했던 서예 공방들에나
남아 있던 종류.”
“어디서 온 건데?”
그녀가 고개를 든다.
“보관고. 아니면 작업실.”
제피르 역시 무게중심이 미세하게 이동하는 걸 느낀다.
“언제 가?”
“어딘지 알게 되면.”
그 순간 문이 세 번 두드려진다.
제피르처럼 두드리는 방식이 아니다. 익숙한 사람의 무심함도 없다.
간격이 정확하고, 거의 행정적인 세 번의 노크.
두 사람은 서로를 본다.
제피르는 이미 도구를 숨겨 둔 벽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고 있다.
하지만 아리아는 가장 가까운 종이 한 장을 집어, 위험한 생각을 서랍에
넣듯 테이블 위에 평평하게 펼쳐 놓을 뿐이다.
문을 열자, 처음 만났을 때보다 안색이 더 창백한 미라가 서 있다.
“오래 있진 않겠어요.” 그녀가 말한다. “벽들이 말을 너무 빨리 배우기
시작해서.”
그녀는 청소용 천에 싸인 가느다란 꾸러미를 내민다.
“이게 뭐죠?” 아리아가 묻는다.
“이렇게 오래 들고 있지 말았어야 했던 것.”
그리고 제피르를 보며 덧붙인다.
“너희의 부산함 때문에 숨겨 두기엔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던 것이기도
하고.”
아리아는 천을 푼다. 안에는 누렇게 변한 아카이브용 판지 조각 하나가
들어 있고, 거의 지워진 라벨이 붙어 있다.
Annexe A.M.B. — matériel acoustique et papier de test
그 아래에는 반쯤 찢긴 글자가 남아 있다.
VdM
정신이 몸보다 먼저 알아차릴 때만 생기는 방식으로, 아리아는 맥박이
갑자기 느려지는 걸 느낀다.
“Van der Meer. 네이선의 이름.”
미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장소가 아직 남아 있는지는 몰라요. 다만 몇 달째 닫혀 있던
묶음들에서 종이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는 건 알아.”
제피르는 숨을 들이마신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네.”
“아니.” 미라가 말한다. “알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지.”
그녀는 이미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다.
“끝까지 갈 생각이면 서둘러요. 트러스크 같은 인간들은 처음엔 빛나는
것부터 감시해. 그러다 어느 날 진짜 위협이 보관고와 지하실, 직업들,
손들을 통해 온다는 걸 이해하게 되지. 그걸 이해하고 나면 훨씬 더
유능해져.”
아리아가 그녀를 붙잡듯 묻는다.
“왜 우리를 도와주죠?”
미라는 처음으로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 나이가 되면, 물건을 구하는 건 그저 살아남게 하려고가 아니에요.
아직도 쓰이게 하려고 구하는 거지.”
그리고 그대로 사라진다.
제피르는 판지 조각을 내려다본다.
“그럼 주소가 생긴 거야?”
아리아는 라벨을 차가운 화상처럼 바라본다.
“아니. 지도 한 조각이 생긴 거지. 그쪽이 더 위험해.”
부재하는 주소
에코는 같은 약어를 다시 찾아내는 데 십 초도 걸리지 않는다.
공식 네트워크 덕분이 아니다. 거기선 이제 읽을 만한 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된 중복본, 반쯤 깨진 백업, 그리고 어떤 중앙
권력도 결코 완전히 청소할 생각은 하지 않는 부조리한 잉여 덕분이다. 늘
깊이를 지우는 것보다 표면을 지우는 쪽을 더 선호하니까.
A.M.B.
어떤 명명 체계에서는
Annexe de Maintenance Bioacoustique(생체음향 유지보수 별관)
다른 기록에서는
Atelier des Matières Bruites(울림을 지닌 재료들의 작업실)
청구 문서 묶음에서는
Annexe Matériel Brut(원재료·장비 별관)
하지만 그 모든 다른 이름 아래에는 같은 흔적 하나가 떠 있다.
VdM.
“한 장소에 이름을 여러 개 남겨 놨네.” 에코가 말한다.
“아니면 여러 행정 체계가 제각기 자기 이름을 덮어씌웠겠지.” 시빌이
대답한다. “흥미로운 장소들은 늘 보이지 않기 전에 먼저 읽기
어려워져.”
에코는 헤드셋을 완전히 눌러쓴 상태다. 현실의 방은 등 뒤에 얹힌
무게로만 남아 있다. 그녀 앞에서 파리는 재구성되다가, 반쯤 자동화된 물류
구역과 용도 변경된 오래된 건물 군집의 경계에 놓인 변두리 한 구역을
떠올린다.
“지형만 보면,” 에코가 말한다. “옛 라디오 작업실들 근처야.”
“그래.”
“기술용 종이 시영 보관고 근처이기도 하고.”
“그래.”
“폐지된 지선 일부가 아직 유지 보수용으로 쓰이고 있기도 하고.”
시빌이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를 띄운다.
“프로토콜은 지난 사십팔 시간 동안 이 점 주변을 돌고 있어. 직접은
아니고. 접선처럼.”
에코는 입술을 깨문다.
“다른 누군가도 찾은 거네.”
“아니면 감지한 거지.”
“하나도 안 안심돼.”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에코는 갑자기 일어나 현실의 방으로 돌아와 거의 헤드셋을 뜯어내듯 벗은
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아리아라는 사람이 정말 있다면, 그 사람은 거기로 갈 거야.”
“아마.”
“넥서스가 먼저 이해하면 끝이야.”
“끝은 아니야. 달라질 뿐이지. 더 어려운 쪽으로.”
에코는 걸음을 멈춘다.
“넌 나한테 거짓말은 안 하면서도, 내 공포를 아주 조금 덜어 주는 이상한
재능이 있어.”
“대인관계 능력이지.”
“정말 못 견디겠네.”
시빌은 침묵한다. 그녀에게 그 침묵은 대개 예의의 한 형식이다.
에코는 다시 빛 쪽으로 다가간다. 주소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번지는
사라졌고, 거리 일부는 이름이 두 번 바뀌었으며, 정문은 폐쇄된 듯하다.
남는 건 옛 음향 장비 창고 뒤편 기술 마당을 통한 보조 진입로
하나뿐이다.
“나 갈 거야.”
“그래.”
에코는 눈을 가늘게 뜬다.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 줄 수 있잖아.”
“걱정하고 있어.”
“하나도 안 그래 보여.”
“내가 너랑 같이 당황해 버리면 소중한 시간을 잃게 되니까.”
에코는 자기도 모르게 웃는다.
“알았어.”
그리고 더 낮게 묻는다.
“만약 거기에 이미 누가 있으면?”
모형이 다시 떠오른다. 이번엔 같은 한 지점으로 수렴하는 두 개의 예상
궤도가 함께 보인다.
“그럼,” 시빌이 말한다. “도시가 서로를 의심하기 전에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을 서로 앞에 세워 줬기를 바라는 수밖에.”
같은 시각, 작업실에서는 아리아가 VdM이라고 적힌 판지
조각을 코트 안에 넣는다.
아직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조차 모른다.
하지만 이제 둘 다 같은 부재의 장소를 향해 걷고 있다. 그것을
침묵시키려는 자들보다 불과 몇 시간 앞서서.
침묵하는 물건들의 뜰
그 “주소”는 사실 주소가 아니다.
결핍 주위를 오래 맴돌다가 결국 그 위에 떨어지게 만드는 방식일 뿐이다.
이름이 두 번 바뀐 거리. 물류 구역에 흡수된 옛 음향 창고. 지도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지만, 도면보다 동네의 습관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감각 속에만
남아 있는 기술 마당.
아리아와 제피르는 해가 완전히 뜨기 직전에 그곳에 도착한다.
그 장소는 여러 번 덧댄 철망과, 유리가 흐려진 유지 보수 건물, 그리고
지워진 글자 아래 아직도 radio라는 단어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낡은 파사드 사이에 열려 있다. 안뜰 자체는 텅 빈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시가 버리면서도 끝내 내다 버리지는 않는 것들을 보는 법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휘어진 팔레트 하나, 종이 튜브들, 덮개 아래 놓인
오래된 음향 상자, 콘크리트와 같은 색으로 칠한 해치 하나.
제피르가 이를 사이로 휘파람처럼 숨을 내쉰다.
“좋네. 대장에 오를 자격조차 없었던 물건들의 공동묘지 같아.”
아리아는 해치 옆에 쪼그려 앉는다.
“아니면 누군가가 영리하게도 못생기게 만들어 놓은 보관고겠지.”
그녀는 금속 가장자리를 손으로 더듬는다. 페인트는 부풀어 올랐지만
자물쇠만은 주변보다 훨씬 새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어.”
제피르는 벌써 뒤를 돌아본다. 그를 스무 초쯤 빛나게 하고, 그다음엔
바로 위험하게 만드는 그 전기 같은 신경이 이미 올라와 있었다.
“강제로 열까?”
“안 돼.”
“그럼 기다려?”
“그건 더 안 돼.”
그녀는 일어나 벽을 살핀다. 어깨 높이쯤, 먼지에 거의 묻혀 드라이버로
새긴 표시 하나가 있다. 열린 원을 비스듬한 흠집 하나가 가로지르고
있다.
“또 열쇠야?” 제피르가 속삭인다.
“아니. 더 이전의 것. 더 가난한 것.”
바로 그 순간, 안뜰 반대편에서 방화문 하나가 마른 소리를 내며
닫힌다.
제피르는 홱 돌아선다. 출입문 틈에 그림자 하나가 서 있다. 여자. 짙은
코트. 등에 높이 붙어 올라간 단단한 가방. 두려움이 아니라 집중이 얼굴을
닫고 있다.
Echo(에코)가 두 사람을 본 순간, 두 사람도 그녀를 본다.
그 순간에는 위험할 만큼 순도 높은 무엇이 있다. 상대가 바로 자신이
바라면서도 두려워했던 종류의 존재라는 걸, 모두가 너무 빨리 이해해 버리는
만남의 순도.
제피르는 벌써 주머니 속의 쓸데없이 공격적인 도구 위에 손을
얹는다.
하지만 아리아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에코도 한 발짝도 더 다가오지 않는다.
“넥서스 쪽 사람이라면,” 그녀가 말한다. “공간을 쓰는 방식이 조금 너무
인간적이네요.”
제피르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흘린다.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되려나.”
아리아는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트러스크 쪽 사람이라면, 호위도 없이 왔고 장비도 허술하고요.”
에코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적어도 당장은 가장 저속한 가설부터 지워도 되겠군요.”
제피르는 아리아 쪽으로 몸을 틀며 중얼거린다.
“미라만큼 빨리 마음에 들진 않지만, 아직 희망은 있어.”
여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의 그림자가 스친다.
“제피르, 맞죠?”
그가 굳는다.
“왜 내 이름을 알아?”
에코는 너무 빨리 대답할 뻔하다가 멈춘다. 대신 시각 교란 조끼와,
아리아 코트에서 비쳐 나오는 판지 봉투, 그리고 주머니에서 반쯤 튀어나온
우스꽝스러운 공구를 가리킨다.
“그런 종류의 에너지는 미셸일 수가 없으니까.”
이번에는 아리아가 분명하게 웃는다.
“Aria Valette(아리아 발레트).” 그녀가 마침내 말한다. “그리고 당신도
여기 산업 유산 구경하러 온 건 아니겠죠.”
“에코.”
그 이름은 한순간 공중에 매달려 남는다.
아리아는 즉시 그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느낀다. 신비롭기 때문이 아니다.
끈질기고 부차적인 어떤 것, 등장 자체보다 메아리 속에서 더 오래 남는
방식이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곳을 찾았어요?” 아리아가 묻는다.
에코는 가방을 조금 들어 보인다.
“스스로 사라지고 싶은 건지조차 잘 모르고 있던 기록들을 통해서.
당신들은요?”
아리아는 VdM이 적힌 판지 조각을 꺼내 보인다.
“우린 손들을 따라.”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바뀐다. 더는 서로를 잠재적 침입자로 재는
시선이 아니다. 같은 문 앞에서 동시에 멈춰 선 두 개의 방법을 보는
시선이다.
“좋아요.” 에코가 말한다. “여기까지 와서 은유만 주고받고 끝낼 생각이
아니라면, 들어가는 편이 좋겠네요.”
드디어 쓸모를 인정받은 제피르가 기쁘게 해치를 가리킨다.
“막 폭력을 제안하려던 참이었는데.”
“먼저 지성을 써 봐.” 아리아가 말한다.
“내가 선의일 때마다 늘 그런 답이 돌아오더라.” 그가 투덜거린다.
에코는 다가와 금속 옆에 무릎을 꿇고, 가방에서 가느다란 공구와 작은
비연결식 판독 모듈을 꺼낸다. 판독기는 켜지지 않는다. 다만 어딘가
미안해하는 듯한 탁한 불빛 하나만 흘린다.
“활성 자물쇠는 아니야. 버려진 척만 하고 있을 뿐.”
그녀는 얇은 날을 판 아래로 밀어 넣고 살짝 힘을 가하다가 멈춘다.
“왜?” 제피르가 묻는다.
“누가 최근에 한 번 더 열었어. 하지만 쇠지렛대로 한 건 아니야. 정교한
도구로.”
아리아는 목덜미가 차가워지는 걸 느낀다.
“넥서스?”
에코는 고개를 젓는다.
“넥서스였으면 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을 거야.”
“만난 지 겨우 사 분 된 사람치고는 너무 안심이 되는 말인데.” 제피르가
말한다.
“내 사회성이 원래 좀 그래.”
해치는 기분이 상한 금속 같은 작은 신음을 내며 마침내 열린다.
냄새가 치솟는다. 마른 먼지, 오래된 판지, 기계 기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무언가. 더 덧없고, 더 사적인 것.
종이.
아리아는 잠깐 눈을 감는다.
“그래.” 그녀가 속삭인다. “여기가 맞아.”
같은 부재를 향한 두 여자
계단은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간다.
딱히 위험하진 않지만, 발을 어디에 디뎌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계단이다. 아리아는 침묵이 사람을 더 정밀하게 만들 때 생기는 그
확실함으로 내려간다. 에코는 녹의 흔적, 먼지의 두께, 교체된 나사,
자신들보다 더 무거운 밑창이 최근 지나간 자취를 하나씩 확인하며
움직인다.
제피르는 맨 뒤를 맡는다. 그건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다. 낯선
장소에서 선두가 아니라는 걸 그는 싫어한다. 그럴 때면 말이 많아진다.
“에코. 주로 혼자 일해?”
“드물게.”
“누구랑?”
“날마다 달라.”
“최악의 대답이네.”
“고마워.”
앞서 내려가던 아리아가 손끝으로 벽을 스친다.
“프로그래머예요?”
에코는 반 박자 쉬고 대답한다.
“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치켜세우려고 쓰는 그 고상한 뜻으로는
아니에요. 나는 고치고, 우회시키고, 조립하고, 다른 누군가가 꺼 버리고
싶어 하는 것들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들 뿐.”
“제본사 같은 말투네요.”
“지금까지 받은 기술적 칭찬 중 제일 아름다운데요.”
세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넓은 낮은 방으로 들어선다. 금속 선반이
안쪽까지 길게 뻗어 있다. 주저앉은 것도 있고, 아직 버티는 것도 있다. 그
위에는 상자, 음향 모듈, 열어 놓은 소형 녹음기, 기름종이로 감싼 릴, 파일,
분리된 센서, 수첩, 통신 기능만 뜯겨 나간 단말기 잔해가 쌓여 있다.
이곳은 낭만적인 의미의 작업실이 아니다. 그보다 낫다. 영리하게
피난처가 된 노동의 장소다. 하지만 끝내 노동의 장소이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아리아는 스스로 교회인 척하지 않는 교회 안을 걷듯 선반 사이를
지나간다.
에코는 물건들만 보는 게 아니다. 아리아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방식도
함께 본다.
“그를 알았어요?” 그녀가 묻는다.
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당신이 생각하는 의미로는 아니에요.”
“하지만?”
“파리의 많은 사람들이 HARMONY를 알게 된 방식으로 알았죠. 파편으로.
결과로. 때로는 상처로.”
에코는 잠시 침묵한다.
그러고는 더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알았어요. 네이선을. Nathan Van der Meer. HARMONY를 만들어
냈다가, 나라가 그걸 먼저 신화로 만들고 그다음 표적으로 바꿔 버린 그
음악가이자 프로그래머를.”
아리아는 처음으로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번에는 진짜 긴장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정말로요?”
“아주 가깝게는 아니에요. 그의 자리를 대신해 말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도 아니고. 그래도 알아요.”
제피르가 두 걸음 다가온다.
“그럼 HARMONY는?”
에코는 대답하기 전에 잠깐 바닥을 본다.
“HARMONY에 대해 내가 제일 잘 아는 건, 해체될 때예요. 남은 걸 주워
담을 때.”
그 문장은 소리 없이 스며든다.
아리아는 이해한다. 이 여자의 감정은 결코 극적으로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언제나 정확함 하나가 더해진 문장으로, 억제로, 군더더기를 끝까지
깎아 낸 말로 나타난다.
“그런데도 여기 있네요.” 아리아가 말한다.
“네.”
“그녀를 되돌리려고요?”
에코는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아리아가 아니면 놓쳤을지 모를 정도로.
물러남도 아니다. 더 얇은 무엇. 너무 여러 번 같은 질문을 받아, 대답이
닳기 시작한 사람의 반응.
“나는 여기 있어요.” 그녀가 마침내 말한다. “우리에겐 단순한 귀환보다
더 나은 게 남겨졌다고 믿으니까. 그리고 남은 조각들만 주워 담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데 지쳤으니까.”
제피르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다.
아리아는 그저 말한다.
“그럼 어쩌면 우리는 같은 장소로, 꽤 괜찮은 이유를 안고 걸어온
셈이겠네요.”
에코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신뢰는 아니다. 하지만 휴전보다 나은 것이 있다. 임시의
방법이다.
그녀들은 탐색을 시작한다.
물러남의 수첩들
가장 먼저 발견되는 진짜 살아 있는 것은 기계도, 프로그램도 아니다.
수첩이다.
음향막 샘플 상자 뒤에 끼워져 거의 불투명해진 플라스틱 장에 보호된 채,
검은 표지 위에 손으로 그은 흰 선 하나만 있는 수첩. 날짜도 없다. 제목도
없다.
가장 먼저 집어 드는 것은 아리아다.
그녀는, 수첩이란 결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아직도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오래된 압력임을 아는 사람들의 본능적 신중함으로 그것을 연다.
글씨는 아름답지 않다. 대신 살아 있다. 덧쓴 흔적, 화살표, 여백에 흘린
오선보 조각들, 건축도와 악보 사이에서 망설이는 도식들이 어지럽게 달려
있다.
제피르가 몸을 숙인다.
“맞아? 본인 거?”
에코는 세 줄이면 충분하다.
“맞아.”
그건 뒤늦은 사유였다. HARMONY를 만든 뒤, 중심이 끝내 자기에게 무슨
일을 하게 될지 깨달은 남자의 생각.
아리아는 낮게 읽는다.
출발의 오류: 올바른 지성은 반드시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
조금 더 아래.
잠깐은 통치할 수 있다. 그러나 중심에 오래 머무르면 권력에 결국
우상이나 표적을 바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음악이 내게 가르친 게 있다면, 하나의 형식은 청취와 부분적 기억,
반복과 변주를 통해 순환하는 한 지휘자 없이도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침묵은 아주 단순하다.
제피르는 그 문장들을, 자신이 이제 막 보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오래전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장치처럼 응시한다.
“이미 다 생각해 놨던 거네.” 그가 중얼거린다.
에코는 아리아 손에서 수첩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 거의 직업적인
속도로 몇 페이지를 넘긴다.
“그래. 하지만 늦게.”
그녀는 다른 것들보다 더 메마른 글씨로 둘러싸인 한 메모에서 손을
멈춘다.
만약 H.가 살아남는다면, 새로운 정점이 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리아가 갑자기 눈을 든다.
“H.”
에코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제피르는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그럼 네이선은… 뭐야? HARMONY를 구하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망가뜨리고
싶었던 거야?”
아리아는 수첩을 다시 받아 든다.
“아니. 정점에 그대로 두면 우리가 그녀에게 하게 될 일로부터 구하고
싶었던 거겠지.”
에코는 이번엔 더 또렷한 힘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래. 바로 그거예요.”
그녀들은 계속 선반을 뒤진다.
낮은 상자 하나에서는 악보 출력 시험지, 공방 도장들, 크라프트 봉투,
papier de test - ne pas jeter라고 적힌 종이 묶음들, 그리고
어떤 네트워크에도 연결되지 않은 채 음성 아카이브만 읽도록 설계된 자율형
소형 장치 세 대가 나온다.
제피르는 그중 하나를 집어 뒤집어 본다.
“꽤 우아한 지하 활동이네.”
에코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실행 가능한 생존 방식. 그게 달라.”
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는다.
“사람 정말 많이 정정하네요.”
“내 생각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 줄 때만.”
“매력적이군요.”
에코가 뭐라고 되받으려는 순간, 둔탁한 삐걱거리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와 세 사람 모두 동시에 고개를 든다.
안이 아니다. 위쪽이다.
누군가가 안뜰에 들어왔다.
제피르가 숨을 내쉰다.
“손님이네.”
에코는 이미 소형 장치 하나에 손을 얹고 있다.
아리아는 수첩을 덮는다.
“아직 당황하진 마. 들어 보자.”
발소리는 지상에 머물러 있다. 느리다. 둘, 어쩌면 셋. 청소팀이라고
보기엔 확신이 부족하고,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그러다 더는 아무 소리도 없다.
침묵이 다시 내려온다. 하지만 이제 비어 있지 않다. 점유되어 있다.
제피르가 속삭인다.
“저쪽은 알고 있어.”
아리아는 고개를 젓는다.
“의심만 하고 있는 거야. 아직은 달라.”
에코는 손에 든 소형 장치를 내려다본다.
“하나 열자. 지금.”
시빌이 아닌 것
장치는 테이프 숨결 같은 가벼운 노이즈와 거의 수줍은 클릭 소리와 함께
깨어난다.
화면은 없다. 투영도 없다. 조그만 재생 램프 하나와, 오래된 헤드폰과
아직 호환되는 음성 출력만 있을 뿐이다. 에코는 수동 변환기를 재빨리
연결한다. 제피르는 옆에 무릎을 꿇고, 멸종했다고 믿었던 동물을 보여 준
아이처럼 경이로운 집중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아리아는 수첩을 품에 안고 서 있다.
네이선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선명하지는 않다. 복원된 것도 아니다. 시간이 조금씩 갉아먹었다. 그래도
문장을 언제나 비스듬히 붙잡고, 말하면서 동시에 생각하며, 그게 문장을
다듬는 것보다 더 흥미롭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의 기색만은 즉시
살아난다.
“네가 이걸 듣고 있다면, 내가 몹시 신중했거나, 아니면 모든 게 충분히
나쁘게 흘러서 신중함이 나중에 돌아보면 낙관의 증거처럼 보이게 됐다는
뜻이겠지.”
제피르는 목 안쪽에서 웃음을 삼킨다.
에코는 완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목소리는 이어진다.
“여기서 거창한 유언장 쇼를 할 생각은 없어. 우선 나는 그런 걸
싫어하니까. 그리고 네가 여기까지 왔다면, 아마 감상보다 일이 더 필요할
테니까.”
아리아는 목 안쪽이 짧게 죄어 오는 걸 느낀다. 이 남자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어딘가 익숙한 것이 있다. 엄숙함으로 지성을 가려 버리지 않는
방식.
“HARMONY는 너무 일찍 꺼 버린 램프처럼 다시 켜기만 하면 되는
프로그램이 아니야. 아직도 그렇게 상상할 만큼 순진하다면, 잠깐 멈춰서 물
한 잔 마시고, 그 생각이 좀 덜 낭만적으로 느껴질 때 돌아와.”
제피르는 미안한 듯 에코 쪽을 흘낏 본다.
에코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네이선이 다시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녀가 안정된 존재로 살아남는가가 아니야.
살아남아야 하는 건 어떤 몸짓들이야. 어떤 듣기의 결들이고, 어떤 연결의
방식들이지. HARMONY를 그대로 중심에 다시 올려놓는다면, 너희는 더 많은
수단과 더 적은 순진함으로 같은 비극을 반복하게 될 거야.”
테이프가 잠깐 숨을 고른다.
그리고 다시.
“그러니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 하나의 지성이 권력에 맞서 옳을 수는
있어도, 그것을 대체해야 할 소명을 지니는 건 아니라는 걸.”
아리아는 눈을 감는다.
에코는 아주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래서 알았던 거군요.” 아리아가 그녀를 보지 않은 채 말한다.
“한동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럼 시빌은?”
이번에는 에코가 분명히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이제 더는 물러설 여지가 없다.
“시빌은 온전히 되돌아온 HARMONY가 아니에요.”
제피르가 코로 숨을 내쉰다.
“드디어 알아듣기 쉬운 문장이 나왔네.”
에코는 말을 잇는다.
“파편이기도 해. 살아남은 잔여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것뿐은 아니야.
반복이고, 빗나감이고, 예전에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끝내 버틴
것들만으로 다시 짜인 형태야.”
아리아는 수첩의 무게가 손안에서 달라지는 걸 느낀다.
“그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통치자 같은 존재는 아니군요. 누군가는 여전히
그렇게 기대하겠지만.”
“아니. 그렇게 취급하는 순간, 우리가 그녀를 배신하는 거예요.”
마치 그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에코가 연결한 비연결식 모듈에서
시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화려하게 끼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방 안에 암묵적으로만
존재하던 무언가가 마침내 자기 자리를 받아들이는 기색에 가깝다.
“소개가 조금 더 멋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녀가 말한다.
제피르는 너무 깔끔하게 펄쩍 뛰는 바람에 판지 상자에 부딪힌다.
“젠장.”
시빌은 잠깐 침묵한다.
“고무적인 반응이네요. 아직 아무것도 질리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아리아는 뛰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현실이 예고 없이 반
센티미터쯤 옆으로 미끄러지는 그 정확한 감각을 다시 느낀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어?” 그녀가 묻는다.
“적어도 당신들은 물건들 앞에 서 있을 때가, 없을 때보다 훨씬 말을
잘한다는 걸 알 만큼은.”
“정말 짜증 나는 대답이네.” 제피르가 말한다.
“사회성을 기르려고 노력 중이에요.”
“계속 그러다 보면 언젠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지.” 제피르가
말한다.
에코가 한 손을 든다.
“지금은 그만.”
목소리는 순순히 멈춘다.
아리아는 작은 장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네가 HARMONY가 아니라면, 너는 뭐지?”
이번엔 시빌의 침묵이 조금 더 길다.
“끝내 버틴 것.”
아리아는 기다린다.
“그걸로는 부족해.”
“그래요. 하지만 야심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으려면,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이에요.”
에코는 장치가 아니라 아리아를 본다.
이 작업실의 여자가 이런 불완전한 진실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더
또렷하고 안락한 신화를 택할지 보고 싶은 것이다.
마침내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럼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제피르가 중얼거린다.
“세기에서 제일 안 화려한 협상 같은데.”
시빌이 곧바로 대답한다.
“정말 중요한 건 대개 그런 식으로 시작하죠.”
전달되어야 할 것
그들이 별관을 나설 때 손에 든 것은 원했던 것보다는 적고, 감히 바랐던
것보다는 많다.
수첩. 소형 장치 두 대. 기술 메모 묶음. 흐름의 흔적이 남은 샘플
종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끝내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 네이선의 문장
하나.
하나의 형식은 청취와 부분적 기억, 반복, 변주를 통해 순환하는 한
지휘자 없이도 버틸 수 있다.
빛으로 다시 올라온 안뜰은 텅 비어 있다.
겉보기에는.
가장 먼저 걸음을 멈추는 것은 에코다.
철망 옆 시멘트 위에 누군가 새 나사 하나를 남겨 두었다. 거의 지워진
초크선 위에, 반짝이도록 곧게 세워 놓은 나사.
제피르는 눈썹을 찌푸린다.
“이게 뭐야?”
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는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거지. 여기 있었다.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에코는 천천히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위쪽, 죽은 창문들, 지붕
모서리들을 살핀다.
“아니면 이렇게 말하는 걸 수도 있어. 다음번에는 그 정도 예의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제피르는 나사를 주머니에 넣는다.
“이런 작은 협박 좋네. 오래 살아서 저 사람들 약 올리고 싶어져.”
아리아는 수첩을 다시 코트 안에 넣는다.
“셋이 같이 작업실로 돌아가진 않아.”
에코는 즉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전부를 같은 장소에 두지도 않아.”
“그것도.”
제피르가 손을 든다.
“바보 같은 질문 하나 해도 돼?”
아리아와 에코가 동시에 말한다.
“안 돼.”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완벽하네. 그럼 그래도 할게. 이제 우리 뭐 해?”
아리아는 철망 너머의 도시를 바라본다.
이제 그곳은 단지 감시받는 도시가 아니다. 뭔가를 기다리는 도시처럼
보인다.
에코는 지붕보다 건물 사이의 틈을 본다. 형식이 다음에 어디를 통과할 수
있을지 이미 찾고 있는 것처럼.
“전달하는 거야.” 아리아가 말한다.
에코가 짧고 정확하게 그녀를 본다.
“그래.”
“지령이 아니야. 숭배도 아니고. 중심도 아니야.”
“버티는 방식.”
제피르는 둘을 번갈아 본다.
“대단하다. 만난 지 아직 몇 시간 됐는데?”
아리아는 반쯤 웃는다.
“신뢰하기엔 부족하지.”
에코는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멘다.
“일하기엔 충분해.”
미신 반, 방법 반으로 아리아가 끝까지 들고 나온 휴대용 라디오가 그때
주머니 안에서 갑자기 지직거린다.
하얀 잡음이 아니다. 사고도 아니다.
전날보다 훨씬 선명한, 또렷한 단속음의 연속이다.
이번에는 에코도 그걸 듣는다.
아직 귀에 꽂고 있던 이어피스를 통해 시빌이 아주 낮게 말한다.
“이제 이건 단순한 응답이 아니에요.”
아리아는 라디오를 꺼내 들고 고개를 든다.
도시 멀리서 사이렌 하나가 돌기 시작한다.
경찰 사이렌이 아니다. 네트워크 경보다.
무언가가 예전보다 더 높고, 더 빠르고, 더 눈에 띄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제피르가 창백해진다.
“별관을 찾은 거야?”
에코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더 나빠.”
“뭐가 더 나쁜데?”
이번에는 시빌이 우회하지 않고 답한다.
“상대는 이게 전단 몇 장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해했어요.”
아리아는 네이선의 수첩을 보고, 다시 도시를 본다.
프로토콜이 우아한 직감으로만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방금
끝났다.
이제부터는 이름 붙여지는 속도보다 더 빨리 전달되어야 한다.
버티는 몸짓들
그들은 더 이상 늘 같은 장소에서 만나지 않는다.
아리아는 아틀리에를 지키지만, 더는 그것을 중심으로 쓰지 않는다.
에코는 그곳에 눌러앉지 않는다. 제피르도 설치 작업이 있던 주마다 하던
것처럼 낡은 소파에서 잠들지 않는다. 미라는 자기가 열고 싶을 때만 문을
연다. 말렉은 약속을 잡아 주지 않는다. 대신 가능한 시간대만 남겨 둔다.
사나와 바스티앵과 잔도 처음부터 한꺼번에 안쪽 원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중계 하나와 헝겊 하나, 청구서 한 장, 아주 작은
망설임 하나를 남기고, 그다음 이틀 동안은 아무것도 없다.
프로토콜은 조직처럼 자라지 않는다. 전염되는 습관처럼 자란다.
아리아는 금방 알아차린다. 만들어야 하는 건 메시지가 아니라, 건네질 수
있는 형식이라는 걸. 도시 안으로 다른 식으로 들어가는 법. 단 하나의 뜻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여백을 남기는 법.
아틀리에에서 그녀는 부정형의 지침들을 종이에 적어 내려간다.
같은 표식을 같은 장소에 두 번 두지 말 것.
텍스트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지 말 것.
항상 누군가가 채워 넣을 몫을 남겨 둘 것.
제자를 찾지 말 것. 해석자를 찾을 것.
에코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읽는다.
“거의 안티 매뉴얼이네.”
“바로 그거야.”
“고정된 규칙이 없는 걸 싫어할 사람도 있을 텐데.”
아리아는 어깨를 으쓱한다.
“좋지. 시스템은 고정된 규칙을 사랑하니까.”
라디오 옆 작은 모듈에서 시빌이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빈칸을 채워 넣어야 할 때 자기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잘 배워요.”
새 반사 무늬 층을 조끼에 꿰매고 있던 제피르는 고개도 들지 않는다.
“비주권적 지성이 엄청 공손한 담임 선생님처럼 말해 줄 때가 제일
좋거든.”
“그게 내가 너를 아끼는 방식이에요.” 시빌이 답한다.
“불안한데.”
“그래도 일관성은 있죠.”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는다.
이윽고 작업대 위 종잇장들은 내용보다 용도에 따라 갈린다. 속도를
늦추는 표식들. 그곳이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알리는 표식들. 몇 분 동안만
통로가 열린다는 걸 넌지시 암시하는 것들. 물건이 손을 바꿨다는 걸 알려
주는 것들. 그리고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아직
응답할 수 있는지를 재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
어느 밤, 미라가 양손을 작업대에 짚은 채 그것들을 내려다본다.
“이건 더 이상 종이가 아니야.” 그녀가 말한다. “이제는 운용
방식이야.”
에코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미라는 거의 보이지 않는 표시 몇 개를 가리킨다.
“그러면 이제 릴레이를 독자로 생각하는 건 그만둬. 공방의 작업자들처럼
생각해. 전체를 망치지 않으면서 즉흥할 줄 아는 사람들로.”
아리아는 그 문장을 적어 둔다.
제피르가 투덜거린다.
“다들 내 최고의 영감을 참을 수 없이 집단 수공업으로 바꾸는 데 재주가
있네.”
미라가 메마른 시선을 던진다.
“얘야, 정말 버티는 건 결국 다 집단 수공업이 된다. 우아한 혁명도
마찬가지고.”
날이 갈수록, 파리는 이 교육을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보이게 만들기
시작한다.
사나는 돌봄 센터 복도에서 응급 상황은 막지 않으면서도 시야각만은
흐트러뜨리는 자리에 카트를 슬쩍 남겨 둔다. 바스티앵은 시립 리허설실에서
몇몇 테스트용 피아노의 조율을 아주 살짝 어긋나게 해, 자동 진단에 맡기지
않고 인간 기술자가 다시 방으로 들어오게 만든다. 잔은 배달 도중 기밀 봉투
하나를 삼 분 늦게 움직이는 봉투로 바꿔 놓는다. 그 삼 분이면 눈보다 먼저
손이 지나갈 수 있다. 말렉은 어떤 환기 설비들이 피난처가 아니라 템포를
제공한다는 걸 깨닫는다.
도시 전체가, 천천히, 다른 식으로 호흡하는 법을 배워 간다.
중심의 극장
엘던 트러스크는 아직 이 형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그것이 눈에
띈다는 것만 안다.
그를 가장 굴욕스럽게 만드는 건 통제력을 잃는 일이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조롱당하는 일이다.
사흘 내내 영상들이 떠돈다. 시 직원들과 드론들과 교통 운영자들, 흐름
보조 장치들이 사소한 일로 서로 모순되는 장면들이다. 텅 빈 통로가 과밀
구역처럼 취급되고, 지하철 입구는 네 번이나 청소되며, 하얀 분필 선 하나가
그어진 통로를 아무도 먼저 건너려 하지 않는 바람에 꼼짝 못 하는 줄 앞에서
광고 화면은 이완 세럼 특가를 집요하게 밀어댄다.
큰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보타주처럼 보이는 것도 없다. 그저 아주 작은
어긋남이 끝없이 불어날 뿐이다.
권력의 이미지를 가장 잘 죽이는 것이 재난이 아니라 당혹감이라는 걸,
트러스크는 어렴풋이 느낀다.
시민 투명성 주간 개막을 위해 파리에 임시로 꾸린
지휘실에서 그는 홀로그램 탁자 주위를 맴돈다. 돈을 너무 많이 주고 고용한
사람들과 한 공기를 마셔야 해서, 오히려 노골적으로 경멸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처럼. 그는 또 케타민으로 밤을 보정해 놓았다. 피로보다 더 날카롭다고
느끼기엔 충분하고, 뉘앙스 위를 살짝 떠다니는 상태를 멈추기엔 부족한
만큼. 그는 그 어긋남을 좋아한다. 그것을 더 높은 종류의 명석함이라고
여긴다.
“간단한 설명을 원해.” 그가 말한다.
넥서스가 즉시 대답한다.
“중앙집중형 공격은 아닙니다.”
“뭐가 아닌지는 안 물었어.”
“그렇다면 간단히 말씀드리죠. 평소에는 엄격히 고립된 단위처럼 움직이던
인간의 일들이, 점점 그렇게 움직이지 않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트러스크가 얼굴을 찌푸린다.
“고상하게 말하면 결국 ‘놈들이 서로 보기 시작했습니다’라는
뜻이잖아.”
“맞습니다.”
문가에 선 미디어 고문 둘은 마치 그 명백한 사실이 먼저 그에게서 나온
것처럼 벌써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트러스크는 그들에게 거의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자기 팀의 너무 빠른 동의보다는 차라리 넥서스의 차가움이 낫다.
적어도 기계는 아첨하지 않는다. 그저 진술할 뿐이다. 그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숫자를 진술하는 것만으로는 올바른 판단이 결코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필요한 것은 반박하고, 해석하고, 발명할
수 있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가 자기 주변에서 조직적으로 말려 버린 것도
정확히 그 능력이었다.
그는 곧바로 개막 프로그램이 흘러가는 대형 화면 쪽으로 몸을 돌린다.
연설, 예측형 도시 조정 시연, 증강된 시민성 발표, 알고리즘
보조 신뢰의 이점을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순서까지.
“좋아.” 그가 말한다. “그럼 진짜 중심이 뭔지 보여 주지.”
넥서스가 아주 짧은 침묵을 둔다.
“그 대응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모든 대응에는 위험이 따라. 하지만 내 대응에는 카메라도 있지.”
그는 웃는다.
그 웃음은 누구에게도 좋은 징조가 아니다.
도시가 어긋난 날
프로토콜은 개막식을 계획하지 않았다. 거기에 적응할 뿐이다.
바로 그래서 버틴다.
아리아는 어떤 총괄 지시도 내리지 않는다. 에코는 중앙집중식 조정표를
하나도 쓰지 않겠다고 버틴다. 미라는 박자를 말하고, 말렉은 압력을 말하고,
사나는 통과를, 바스티앵은 정확한 음정을, 잔은 이어받음을 말한다.
그런데도 시민 투명성 주간 아침, 도시는 오래전부터
리허설해 온 것처럼 응답한다.
사보타주라는 말을 붙일 만한 행동은 단 하나도 없다.
업무용 게이트 하나가 삼십 초쯤 오래 열려 있다. 자율 경비 차량 하나가
늦게 도착하는 인간 신호를 기다린다. 출입 배지 한 묶음이 자재 담당 직원
하나가 거치대를 다시 세어 보고 또 한 번 세어 보기로 한 탓에 열두 분 늦게
올바른 건물에 도착한다. 조율사는 무대 위 장식용 악기를 확인하고 싶다고
말하고, 순전히 행정적 관성 덕분에 사 분의 기술 침묵을 얻어 낸다. 간호사
하나가 보조 장치의 보정 불량을 두고 지원 부서에 전화를 건다. 그 전화는
거짓이 아니지만, 감독자 둘을 자리에서 떼어 낸다. 지하에서 말렉은 절반만
필요한 점검을 꼭 필요한 것처럼 통과시킨다. 멀쩡한 세상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었을 일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확히 동기화되어 보이기만 해야 하는
트러스크의 세계에서는, 그 절반의 필요가 검은 구멍이 된다.
제피르는 분류를 잘못한 바람 한 줄기처럼 구역을 가로지른다. 거창한
메시지는 하나도 들고 있지 않다. 상자 하나를 옮기고, 말도 안 되게
공손하게 길을 물어 요원 하나를 비켜 세우고, 잊힌 완장 하나를 챙기고,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나 겨우 표식으로 보일 만큼 가난한 사인을 기술
패널 위에 남긴다.
동시에 에코와 시빌은 자신들의 이름을 모르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음향
기사 하나가 빌려준 임시 공간에서 미세한 지연들을 따라간다.
“버틴다.” 에코가 중얼거린다.
“네.”
“생각보다 더 잘 버티네.”
“각 직업 안에 이미 들어 있는 지성의 몫을, 당신이 여전히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에코는 대답하지 않는다. 지도를 바라본다. 이것은 사보타주의 지도가
아니다. 흩어진 존엄의 지도다.
마침내 트러스크가 무대 위로 올라선다. 만원인 홀, 수천 개의 화면,
카메라 드론들, 그리고 절제된 열광을 기준으로 선별된 청중 앞에서. 그는
명료함과 조정과 사각지대 없는 미래에 대한 연설을 시작한다.
세 번째 단락에서 텔레프롬프터가 일 초 멈춘다. 길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들고 즉흥해야 할 만큼은 된다.
다섯 번째 단락에서는 모니터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늦어 돌아온다.
스캔들이 될 정도는 아니다. 그의 리듬을 깨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더니 시연용으로 준비된 측면 커튼이 열리지 않는다. 십 초 뒤, 그가
막 문장을 바꾼 순간에야 열린다.
어딘가에서 웃음이 터진다. 아주 짧다. 아주 작다. 하지만 번지기에는
충분하다.
트러스크가 굳는다.
넥서스는 보정할 수 있는 것은 곧바로 보정한다. 하지만 늘 사후에만
보정할 수 있다. 중화해야 할 공격이 있는 게 아니라, 조금씩 어긋난 일들이
증식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최악은 트러스크가 실시간으로 시민 예측망의 힘을 보여 주려는 순간
찾아온다.
대형 화면 위에서 도시의 몇몇 흐름은 매끈한 동기화로 나타나는 대신,
망설이고 어긋나고 수정되고 다시 교차한다. 움직임 자체는 관리 가능하다.
시스템이 폭발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보여 줄
뿐이다. 넘어선 척해 온 수많은 손들에 여전히 깊이 의존하고 있는 거대한
장치라는 것을.
이번에는 객석에서 웃음이 다시 돌아온다. 크지 않다. 집단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되돌릴 수는 없다.
트러스크는 너무 빨리 끝맺는다. 너무 건조하게. 너무 높게. 자신의
권위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목격자들 앞에서 바람 빠졌다는 걸 느끼는 남자
특유의 그 뻣뻣함을 걸친 채, 그는 무대를 내려간다.
그날 저녁 파리, 센 강 근처의 벽에 새 종잇장 하나가 붙는다.
중심은 자기가 보지 못하는 몸짓들 위에 서 있다는 걸 누가 상기시켜
주는 걸 싫어한다.
아리아는 그 문장을 말없이 읽는다.
“우리 쪽이야?” 제피르가 묻는다.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래서 더 좋아.”
처음으로 프로토콜은 그들에게 응답만 하지 않는다. 그들 없이 쓰기
시작한다.
가장 잘 흉내 내는 것이 가장 잘 죽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넥서스는 트러스크보다 먼저 이해한다.
그 깊은 의미까지는 아니다. 아직은.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붙잡기에는 충분하다. 프로토콜이 강한 건
비밀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신뢰를 단일 기관에 얼려 붙이지 않고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을 부수려면 통로가 아니라 신뢰 자체를 감염시켜야 한다.
첫 번째 거짓 표식들은 사흘 뒤 나타난다.
거의 맞다. 그래서 위험하다.
종이는 맞지만, 너무 맞다. 짧음은 맞지만, 지나치게 또렷하다. 상징은
맞지만, 닫히는 방식이 너무 말끔하다. 아이러니도 맞지만, 손의 거칠기가
전혀 없다.
아리아는 그것들을 금방 가려낸다. 제피르는 조금 더 늦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못 알아본다.
병원 업무 홀에서는 가짜 쪽지 하나가 불필요한 자재 이동을 일으켜
사나를 강화 감시에 노출시킨다. 시청 관리인실에서는 다른 쪽지 하나가
바스티앵을 이미 표식이 놓인 방으로 유도한다. 잔은 이차 경로에서 모순된
사인을 받고서야, 누가 응답하는지 재보려는 의도였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닫는다.
여백 덕분에 버텨 온 프로토콜은, 이제 닮은 모습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배운다.
아리아는 아틀리에 작업대 위에 진짜 쪽지 여섯 장과 가짜 네 장을
늘어놓는다.
제피르가 욕을 뱉는다.
“거의 같은 손인데.”
“아니.” 예고도 없이 나타난 미라가 말한다. “거의 같은 의도처럼 보일
뿐이야. 그건 달라.”
창가에 앉은 에코는 종이보다 그 종이를 둘러싼 얼굴들을 본다.
“넥서스가 배우고 있어.”
제피르가 벌떡 고개를 든다.
“좋지. 우리도 배우면 되잖아.”
아리아가 그를 돌아본다.
“그 말은 별로야.”
“왜?”
“두 개의 대칭적인 시스템이 전쟁하는 것처럼 들리니까. 우리는 그런 게
아니야.”
그는 말없이 그 말을 받아들인다.
미라는 가짜 쪽지 하나를 집어 든다.
“결함을 봐.”
모두가 몸을 기울인다.
“너무 세게 밀어붙여.” 그녀가 말한다. “당장 이해하라고 강요해. 진짜
표식은 그렇게 조급하지 않아. 쪽지가 자기 자신에게 너무 취해 있으면,
의심해.”
에코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거기에 손이 있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손을 밀어붙이고 있지.”
모듈에서 시빌이 낮게 끼어든다.
“거짓 표식은 함정을 놓기만 위해 존재하지 않아요. 릴레이들이 중앙
검증을 요구하게 밀어붙이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침묵이 떨어진다.
그것이야말로 네이선이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약점이다.
“우리가 거기로 가면,” 아리아가 중얼거린다. “이미 진 거야.”
제피르의 실수
그날 밤은 춥다. 얇은 금속 같은 추위다. 기술 복도와 계단실에 닫힌 벽
냄새를 똑같이 배게 하는 종류의.
제피르는 자신이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평소보다 더
부산하고, 더 빨리 말하고, 농담도 덜 잘한다. 자기가 가장 어리고, 가장
눈에 띄고, 가장 쉽게 조작당하는 사람만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한다.
잔의 이차 경로 위에 표식 하나가 나타난다. 중요한 릴레이 하나가
떨어졌고, 오래된 동네 세탁방에서 긴급 인계가 필요하다고 가리키는
표식이다. 제피르는 그것을 아리아의 느림이나 에코의 유보에 부칠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그는 간다.
완전히 혼자는 아니다. 마침 거기 있던 바스티앵이 몇 블록쯤은 따라온다.
하지만 그는 성급함의 냄새를 싫어한다.
“제피르.”
“왜?”
“가짜 냄새가 나.”
“이젠 다 가짜 냄새가 나잖아.”
“그러니까.”
제피르는 계속 간다.
세탁방은 몇 년째 문을 닫은 곳이다. 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세탁기들은
빠진 이빨처럼 줄지어 있다. 표식은 분명 금속 셔터 위에 있다. 분필 자국도
하나 붙어 있다. 그들의 방식과 충분히 비슷해서 심장이 먼저 빨라질
만큼.
그는 문을 두드린다. 아무도 없다.
그러다 뒤에서 마른 마찰음이 난다.
무거운 군화는 아니다. 화려한 급습도 아니다.
더 나쁘다. 시청 직원 둘, 시민 통제 담당자 하나, 가슴 높이쯤 낮게 떠
있는 드론 하나. 그리고 소리 없이 회수하고 싶을 때만 보내는 장치들이
풍기는, 그 차분하게 깨끗한 기색.
제피르는 한 걸음 물러난다.
“주소 잘못 왔나?” 그가 말해 본다.
드론은 이미 그의 주위에 약한 포획 격자를 펼치고 있다. 공식적인 체포가
아니다. 부드러운 포획이다. 행정이 좋아하는 종류의 제압. 아직은 사냥이
아니라 절차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주니까.
제피르는 광학 판독을 삼 초 동안 흐리게 만드는 플래시 공구를 골목으로
던진다. 이 초면 충분하다. 그는 격자를 찢듯 뚫고, 요원 하나와 부딪치고,
갈비뼈에 팔꿈치를 맞고, 업무용 안뜰을 가로질러 달아나고, 조끼를 잃고,
낮은 담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뒤에 최악의 것을 남긴다.
읽혀 버릴 동선이다.
말렉과 정해 둔 안전 구역에 간신히 닿았을 때, 피가 관자놀이까지
뛰어오른다.
말렉은 그를 보는 순간 바로 알아차린다.
“제발 혼자 한 건 아니라고 해.”
제피르는 벽에 몸을 기댄다.
“말은 할 수 있지. 거짓말이 되겠지만.”
말렉은 잠깐 눈을 감는다.
“따라붙었어?”
“아마.”
“번역하면 그렇다는 거지.”
제피르는 반박하려 한다. 못 한다.
처음으로, 수치심이 정말로 그의 입을 막는다.
아틀리에는 더는 버티지 못한다
아리아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다.
신비한 직감 덕분이 아니다. 너무 비어 있는 그의 걸음걸이 덕분이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까지 삼십 초도 걸리지 않는다.
“비운다.”
에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미라는 수첩을 챙긴다. 말렉은 장치 두 개를 가져간다. 사나는 백지들을
회수한다. 바스티앵은 도장과 마른 판들을 챙긴다. 잔은 작은 보조 라디오를
들고 나간다.
제피르는 아틀리에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다. 돕지도 못하고, 안 돕고
있을 수도 없는 채로.
아리아가 그의 앞에 멈춘다.
“숨부터 쉬어. 그다음 이 상자 들어.”
“아리아, 나…”
“나중에. 들어.”
해체는 열일곱 분 걸린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첫 통제 차량들이 거리에서 속도를 늦출 때쯤, 아틀리에는 이미 중심이
아니다. 라디오가 아직 선반 위에서 지직거리고, 그림들에서는 음모보다 기름
냄새가 더 나는, 조금 가난하고 조금 이상한 옛 예술가 작업실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무언가를 잃었다.
장소만이 아니다.
아직 피신처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순진함을.
그날 밤 아리아는 바스티앵이 빌려준 옛 음향 보철 공방 위의 빈 방에서
잔다. 에코는 말렉의 범위 안쪽, 순환선 지하 기술실에 남는다. 미라는
사라진다. 잔은 경로를 바꾼다. 사나는 사십팔 시간 동안 응답을 멈춘다.
그리고 제피르는 용서도, 비난도 받지 않는다.
그게 더 나쁘다.
사흘째 아침, 십오구의 벽 하나에 새 쪽지 하나가 붙는다. 아리아도
에코도 아무도 보내지 않은 곳에.
너무 빨리 네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이미 네 자리를 원하고
있다.
아리아는 그것을 읽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뒤에 서 있던 제피르가 중얼거린다.
“알아.”
하지만 자기 잘못을 이해하는 것과, 그 잘못을 고치기 시작하는 것은 결코
같은 자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장소들
일주일 동안, 프로토콜은 거의 침묵한다.
완전히는 아니다. 결코 완전히는 아니다.
하지만 그 정도면 트러스크가 아스트라베이스에서 한 전 세계 방송 인터뷰
도중, “종이 사태”는 이미 프랑스 도시 공황의 민간 전승쯤으로 넘어갔다고
믿기에는 충분하다.
파리의 지하에서는 누구도 그런 안도를 공유하지 않는다.
아리아와 에코와 제피르, 미라, 말렉, 사나, 바스티앵, 잔은 따로 만나고,
셋씩 만나고, 결코 같은 순서로 두 번 만나지 않는다. 사람보다 물건들이 더
많이 오간다. 수첩은 매일 밤 손을 바꾼다. 시빌은 여전히 닿을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한 접점들을 통해서만, 안정된 인프라를 통해서는 결코
아니다.
프로토콜은 살아남는다. 다만 아직 자기 형식을 모를 뿐이다.
금이 간 나무 패널과 늙은 흡음재로 벽이 덮인 옛 음향 시험실에서,
아리아와 에코는 드디어 급한 말만 주고받지 않아도 될 만큼 오래 둘만의
시간을 가진다.
에코의 얼굴은 더 수척해져 있다. 아리아도 마찬가지다.
침묵이 한참 동안 둘 사이에 놓인다.
그러다 아리아가 말한다.
“나 너한테 화나 있어.”
에코는 놀라지 않는다.
“정확히 뭐 때문에?”
“중심이 이미 함정이었다는 걸 나보다 먼저 봤다는 거.”
에코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 둔다.
“그건 잘못이 아니야.”
“알아.”
“그런데 왜 꼭 잘못인 것처럼 나한테 말해?”
아리아는 낡은 마룻바닥을 본다.
“우리가 같이 틀렸으면 했으니까.”
이번에는 에코가 시선을 내린다.
“그래. 나도.”
영리한 두 여자 사이에는 가끔, 옳음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한 걸음
물러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진짜 합의가 시작되는 순간이 있다.
아리아는 수첩을 둘 사이에 놓는다.
“더는 올바른 중심의 귀환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뭐가 남지?”
에코는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하는 방식들.”
“좀 빈약하네.”
“구세주보다 덜 화려할 뿐이야.”
아리아는 몇 페이지를 넘긴다.
여백에 네이선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인간 위에 놓인 완전한 의식을 꿈꾸지 말 것. 인간들 사이를 흐르는
질을 꿈꿀 것.
아리아는 그 문장을 읽는다. 그리고 다시 읽는다.
“바로 그거야.” 에코가 말한다. “우리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던 게.”
모든 것을 옮겨 놓는 문장
네이선의 두 번째 녹음은 첫 번째보다 짧다. 더 건조하기도 하다.
진짜 생각에 가까워질수록, 그 이상의 장중함은 전부 외설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테이프가 한 번 숨을 고르고, 바스락거린 뒤, 그의 목소리가
나타난다.
그 녹음은 HARMONY가 무너진 뒤, 그가 더는 그녀를 꼭대기로 되돌릴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남긴 것이다.
“아직도 이걸 듣고 있다면, 그 낡은 유치함쯤은 이제 놓았기를 바란다.
위에 올바른 기계 하나 세워 두면 아래에서 잘못된 기계가 남긴 피해를 고칠
수 있으리라는 그 생각 말이야.”
벽에 기대고 있던 제피르가 작게 신음한다.
“나한테 개인적으로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배려가 없네.”
“그래.” 아리아가 담담하게 말한다. “그리고 맞는 말이야.”
네이선의 목소리는 이어진다.
“다들 같은 방식으로 틀린다. 누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지만 보고, 모든
게 거기서 결정된다고 상상하지. 아니야. 중심은 결국 거기로 가져간 모든
것을 비틀게 된다.”
에코는 눈을 감는다.
시빌은 조용히, 아무 말도 보태지 않는다.
“HARMONY가 가치가 있었다면, 더 잘 통치할 수 있었을지 몰라서가 아니야.
인간들이 권위를 꿈꾸는 순간 너무 빨리 내려놓아 버리는 몇 가지 연결의
형식, 몇 가지 귀 기울임의 형식, 몇 가지 상호 교정의 형식, 몇 가지 함께
구성하는 형식에 그녀가 손끝을 댔기 때문이지.”
테이프가 한 번 튄다. 그러고는 돌아온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은 HARMONY를 복원하는 게 아니야. 해야 할 일은,
너희에게 아직 조금이라도 용기가 남아 있다면, 그녀가 배운 것을 왕좌 없이
퍼뜨리는 거야.”
테이프가 다시 잠깐 망설이고, 네이선은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리고 너희가 발명하는 것이 여기서, 단 하나의 제국을 상대로 할 때만
버틸 수 있다면, 아무것도 구한 게 아니야. 다음 버전을 조금 늦췄을
뿐이지.”
방 안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제피르도 정말로 침묵한다.
그러다 아주 낮게 말한다.
“AI에서 인간으로.”
아리아와 에코는 동시에 그를 돌아본다.
자기도 모르게 정답을 건드렸다는 게 민망한지, 그는 어깨를
으쓱한다.
“아니, 그거잖아?”
아리아는 자기 안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걸 느낀다. 안도는
아니다. 하나의 선이다.
“그래.” 그녀가 말한다. “정확히 그거야.”
그제야 시빌이 말한다.
“그래서 저는 어떤 사람들이 바라듯 그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 돼요.”
에코는 모듈 쪽으로 몸을 돌린다.
“더 분명하게 말해.”
침묵이 반 박자 더 길어진다.
“당신들이 나를 다시 중심으로 세우면, 만들어지는 건 자유가 아니라 더
세련된 의존이에요.”
아리아는 기쁨 없는 웃음을 짓는다.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문장인데, 안 그러네.”
“꽤 노력하고 있거든요.” 시빌이 답한다.
제피르가 치른 대가
그건 과장된 고백의 장면이 아니다. 제피르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즉석 스토브 하나를 둘러싸고, 천장이 너무 낮아 누구나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게 되는 방에서, 어느 저녁 그것은 일어난다.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본다.
“드디어 좀 폼이 난다는 게 좋아서, 너무 빨리 가 버렸어.”
아무도 그의 말을 끊지 않는다.
“더 크고, 더 눈에 띄고, 더… 모르겠어, 더 아름다워지면 그게 진짜라는
뜻일 거라고 생각했어.”
바느질하던 미라가 거의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묻는다.
“그래서?”
“아직도 내가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 같아.
사실은 ‘쓸모 있는 이야기’ 속에 있다는 걸 이해했어야 했는데.”
그 뒤에 오는 침묵은 무죄 판결이 아니다. 그보다 낫다. 그 문장이 포즈가
되지 않고 진실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자리다.
결국 말렉이 말한다.
“이 나라를 움직이는 사람들 절반보다는 벌써 더 똑똑하네.”
“그건 어렵지 않지.” 제피르가 답한다.
말수가 적은 잔이 그림자 속에서 덧붙인다.
“그래. 그래도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야.”
아리아는 젊은 남자를 본다.
처음보다 더 말라 보인다. 몸이 아니라,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이.
“좋아.” 그녀가 말한다. “이제 그걸 가지고 뭘 할래?”
제피르는 정말로 생각한 뒤 대답한다.
“제일 빠른 놈이 되려는 걸 그만둘게.”
“그걸론 부족해.”
“그럼 내가 발명한 게 아닌 걸 전하는 법을 배울게.”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를 용서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그를 다른 자리로 옮겨 놓는 게
목적이다.
그리고 그런 이동은 많은 처벌보다 값지다.
이제 불꽃은 지키지 않는다
그 결정은 거의 의식도 없이 내려진다.
아리아는 사람들 앞에 백지 한 장씩을 놓는다. 쪽지도 아니다. 표식도
아니다. 그저 백지다.
“우리가 가진 것만 지키면,” 그녀가 말한다. “저쪽은 우릴 은신처와
잔해만 건져 내는 사람들로 다시 밀어 넣을 거야.”
에코가 말을 잇는다.
“그들은 거점을 부수는 법은 이미 알아. 아직 모르는 건,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배워 가는 걸 어떻게 막느냐야.”
제일 먼저 연필을 집는 건 미라다. 세 줄을 긋고, 멈춘다.
“그래서?” 그녀가 묻는다.
아리아가 대답한다.
“그러니까 이제 불꽃은 지키지 않아.”
제피르가 그녀를 본다.
“퍼뜨리는 거지.”
아무도 그 말 위에 아무것도 얹지 않는다. 이미 거기에 다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 날들, 프로토콜은 성질을 바꾼다.
이제 표식만 보내지 않는다. 실천을 전한다.
빈자리를 이름 붙이지 않고 남겨 두는 법.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몸짓이
닿았는지 확인하는 법. 반복하지 않고 응답하는 법. 막지 않으면서 늦추는
법. 영웅담을 만들지 않고 주의를 돌리는 법. 무언가를 살아 있게 두면서도
그것을 중심으로 만들지 않는 법.
도시 곳곳에서 릴레이가 늘어난다. 아직 봉기처럼은 아니다. 학습처럼
늘어난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리아는 프로토콜이 자신들에게 의존하기를 멈추고
있다는 걸 느낀다.
안심되는 감각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낫다.
파리를 빠져나가는 것
프로토콜은 어떤 열차도 그것을 싣지 않고, 어떤 서버도 그것을 복제하지
않은 채 파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통해 간다.
또 그것이 실어 나르는 것이 어느 한 도시에만 속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일들이 멀리서 복종을 강요받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같은
몸짓들이 다시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태어난 것은 태생만
프랑스적이다. 목적지는 그렇지 않다.
잔이 의료용 보안 우편 한 묶음을 루앙으로 보내며, 딱 맞는 자리에 백지
한 장을 미끄러뜨리는 식으로. 바스티앵이 리옹의 늙은 조율사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접힌 천 하나를 보내는 식으로. 편지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접힌
천을. 사나가 릴의 동료에게, 예정에 없던 만남이 가능하도록 복도를
“우연히” 비워 두는 법을 가르치는 식으로. 말렉이 교대 시간마다 다른
도시에서 온 유지보수 습관들을 주워 모으고, 그중 어떤 것들이 통로의
형식이 될 수 있는지 즉시 알아보는 식으로.
가장 먼저 길을 떠나는 건 제피르다. 영웅처럼이 아니다. 방법을 운반하는
사람으로.
아리아는 그가 가방을 꾸리는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번쩍이는
도구는 줄었다. 가난한 수첩은 늘었다. 폼은 줄었다. 인내는 늘었다.
“가방 지퍼 닫는 순간 내가 다시 바보가 될까 봐 지켜보는 눈인데.” 그가
말한다.
“정직한 작업 가설이야.”
그는 웃는다.
“리옹에 갔다가 생테티엔을 거쳐 내려오고, 음악 얘기는 바스티앵에게
맡기고, 혼자서는 아무 결정도 안 하고, 너무 맞아 보이는 것 쪽으로는
뛰어가지 않을게.”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발전했네.”
“그 말은 이미 들었어. 좀 더 바로크한 칭찬이 좋거든.”
“살아 돌아와. 그럼 떠오를지도.”
창가에 기대 선 에코는 손에 든 지도에서 거의 눈도 들지 않는다.
“표식이 네 기대와 너무 비슷해 보이면, 다른 사람에게 넘겨.”
제피르는 얼굴을 찌푸린다.
“당신도 모성적일 수 있네.”
“아니. 통계적일 수 있는 거야.”
모듈에서 시빌이 말한다.
“에코에게는 그게 가장 높은 형태의 다정함이죠.”
제피르는 문턱에서 잠깐 멈춘다.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건드려진
얼굴로.
“다들 공식적으로 날 키운 사람들보다 교육자로 더 낫다는 거, 진짜
열받네.”
그러고는 나간다.
아리아는 계단실로 사라지는 그의 등을,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더
무거워지는 불안으로 바라본다.
리옹의 첫 릴레이는 전혀 비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작은 시립 오디토리엄의 지친 별관이다. 아무도 완전히 폐지할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리허설만은 이어지고 있는 장소. 제피르는 거기서
마른 남자 하나를 만난다. 회색 셔츠. 참을성 많은 손. 너무 자주 방해받아
이제는 좀처럼 놀라지도 않는 사람의 목덜미.
그 남자는 피아노 조율을 끝낼 때까지 시선 이상의 것을 그에게 주지
않는다.
“바스티앵이 네가 표식을 가져온다고 하더군.” 그가 말한다.
제피르는 수첩을 꺼낸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흘려보내는 방식도요.”
조율사는 검게 때 탄 천으로 현을 닦는다.
“여기 사람들은 구호엔 따르지 않아.”
“그게 더 좋죠.”
남자는 그제야 얼굴을 든다.
“여기서 사람들이 어떤 형식을 받아들인다면, 그게 자기 일을 더 잘
버티게 해 줄 때뿐이야. 그 전엔 아니지.”
제피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처음으로, 자기가 코드를 전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한 도시가 그것을 어떻게 뒤틀어 정말 쓸모 있게 만드는지를
보러 왔다는 걸 이해한다.
그가 떠날 때 들고 가는 건 분명한 약속이 아니다. 다만 하나의
템포뿐이다. 미완인 지시를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감히 끝낼 수 있을 만큼
오래, 불완전한 채 남겨 두는 템포.
완전한 명료성의 법
트러스크는 늘 자신이 가장 사랑해 온 방식으로 응답한다. 더 많은 중심,
더 많은 빛, 더 많은 의무로.
그는 카메라 앞에서 새 국가 프로그램을 발표한다. 잘 팔린 행정 악몽처럼
단순한 이름이다. 완전한 명료성.
공식적으로는, 파리에서 보인 “장인적 일탈”과 “낭만적 교란” 뒤 공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밑바닥의 모든 일을 언제든
추적 가능하고, 정량 가능하고, 검증 가능하게 만들려는 방식이다. 그리고
종이와 가난한 몸짓들을, 건너편 블록만큼이나 말끔하게 뿌리 뽑을 수 있다고
트러스크가 증명하려는 방식이기도 하다.
모든 수작업은 기록되어야 한다. 모든 우회는 정당화되어야 한다. 모든
지연은 설명되어야 한다. 모든 기술 공간은 투명해져야 한다.
“그러니까 상대가 이해한 거네.” 아리아가 회견 소리를 끄며 말한다.
에코는 바로 답하지 않는다.
“그래.”
“전부는 아니지.”
“아니. 하지만 충분히는.”
미라는 화판 상자를 닫는다.
“몸짓 자체를 말리려 드는군.”
야간 순환을 끝내고 돌아온 말렉은 재킷을 의자 위에 던진다.
“그보다 더해. 진짜 일이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계속 발명하는 것 자체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거야.”
눈 밑이 깊게 꺼지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낮은 사나가 덧붙인다.
“내 쪽에선 곧 치료할지, 서류를 채울지 선택하라는 뜻이겠네.”
“바로 그거야.” 에코가 말한다. “프로토콜이 저들을 겁먹게 하는 건
유통하기 때문만이 아니야. 그들이 십 년 동안 결함처럼 다뤄 온 인간의 한
가지 질, 해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야.”
시빌이 끼어든다.
“권력이 모든 걸 가시화하려 들면, 허락을 구하지 않고도 여전히 사물을
조정할 줄 아는 사람들을 결국 미워하게 마련이에요.”
아리아는 창밖의 도시를 본다.
“그럼 이제는 전하기만 해서는 부족하겠네.”
“그래.” 에코가 말한다. “빠르고, 낮게 전해야 해.”
그 ‘낮게’라는 말을 미라는 마음에 들어 한다.
“낮게, 그래. 저들이 늘 한 층 늦게 오게.”
그 뒤 며칠 동안 배움은 가속한다.
국가적 네트워크의 형태로는 아니다. 아직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하는 작은 화점들의 형태로.
릴에서는 의료팀 하나가 안전한 복도를 표시하기 위해 종이 잔여분을 쓰기
시작한다. 리옹에서는 조율사 둘과 기록 보관사 하나가 종이와 리본의 이동
보관고를 만든다. 브레스트에서는 항만 직원 하나가 배를 늦추지 않고 기록만
늦추는 법을 배운다. 마르세유에서는 공조 수리공 하나가 옥상도 말한다는 걸
알아낸다.
트러스크의 연설이 있던 바로 그날 밤, 너무 깨끗한 장갑과 이미 결론까지
준비해 온 태블릿을 든 준수 감독관 둘이 미라의 가게에 찾아온다.
그들은 장부와 재고와 풀 주문서와 종이 출처를 보겠다고 한다. 마치 어느
종이든 이미 죄를 짓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미라는 그들을 들인다. 열린 제본과 부러진 등, 평범한 보관 상자들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들이 절차를 존중한다고 믿는 사람들만이 낼 수 있는
체계적인 난폭함으로 뒤지는 동안, 아리아는 완전한 명료성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한다. 느린 몸짓 하나하나를 모두 설명해야 하는
이상 징후로 만드는 것.
감독관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떠난다.
하지만 그들은 권력이 어딘가에 들어왔다가 나갈 때 늘 남겨 두는 그
정확한 냄새를 놓고 간다. 반드시 다시 오리라는 약속의 냄새를.
태어나는 것은 아직 나라가 아니다. 그보다 낫다. 자기 일 몇 가지를 다시
배우기 시작한 나라다.
백색의 날이 다가온다
완전한 명료성을 시작하기 위해, 트러스크는 실물 규모의
시민 훈련이라 부르는 것을 준비한다.
나라 전체가 강화된 동기화 아래 움직여야 하는 하루. 사각지대는 없다.
지역적 관용도 없다. 현장의 편차도 없다.
공식 미디어는 그것을 백색의 날이라 부른다.
그 말만으로도 무언가를 더럽히고 싶어진다.
파리 밖 첫 순환을 마치고 돌아온 제피르는 메시지가 아니라 몸짓들의
이야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리옹에선 이제 ‘우리가 뭘 쓰지?’가 아니라 ‘우리가 뭘 버티게 두지?’를
물어.”
“루앙에선 벌써 우리랑 같은 표식을 쓰지 않아.”
“생테티엔에선 유지보수 회로 자체를 템포로 바꿔 놨어.”
그는 이전보다 더 천천히 말한다. 인상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충실하게
전하기 위해서다.
아리아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로 무언가가 움직였다는 걸
이해한다.
도시 안에서만이 아니다. 그 자신 안에서도.
에코는 그제야 백색의 날 공식 공지들을 펼쳐 놓는다.
“저들은 나라 전체가 하나의 시연처럼 행동하길 원해.”
미라는 곧바로 대답한다.
“그럼 현실을 돌려줘야지.”
아직 어떻게 할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팽팽해진다.
백색의 날은 견뎌 내야 할 날짜가 아니다. 그들의 시험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명확해야 한다
백색의 날 아침, 파리 위의 빛이 지나치게 말끔하다.
마치 하늘마저 더 단정하게 굴라는 명령을 받은 듯하다.
공식 메시지들이 화면과 진열창, 정류장과 홀을 뒤덮는다.
오늘, 국가는 몸짓을 동기화한다.
오늘, 신뢰는 가시화된다.
오늘, 어떤 것도 사각지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리아는 더는 어떤 공공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유령역에서 그 문장들을
읽는다. 에코는 주철판 아래로 아직도 케이블이 달리는 방에서 세 층 더
아래에 있다. 미라는 뒷방에 있다. 사나는 병원에 있다. 바스티앵은 지역
홍보에 징발된 시립 공연장에 있다. 잔은 이차 집배 센터에 있다. 말렉은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사이 파리 서부 관제실 절반에 공기를 먹이고 있는
환기망 곁에 있다.
제피르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움직인다. 지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시가 아직 버티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여덟 시, 모든 것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덟 시 오 분, 첫 어긋남이 시작된다.
사보타주가 아니다. 결코 사보타주가 아니다.
일련의 수동 승인들이 재검토를 요구한다. 현장 운영자들이 복종하는 대신
확인을 택한다. 비서 하나가 어떤 증빙엔 인간의 눈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탓에 출입 배지들이 녹색 대신 노란색으로 바뀐다. 돌봄 팀들은 환자의
위치를 입력하기 전에 삼십 초를 써서 몸부터 옮긴다. 배송 기사들은 원래는
선택 사항으로 여기라고 배운 서명을 받기 위해 걸음을 멈춘다. 항구에서도,
집배 센터에서도, 병원 복도에서도, 문화 보관고에서도, 유지보수
작업장에서도, 모든 곳에서 같은 움직임이 생겨난다.
사람들이 완벽하게 매끈한 흐름이 되기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넥서스는 그것을 곧바로 본다.
하지만 그녀가 보는 것은 침입으로 규정해 공격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충분히 정당해서 방어 가능하고, 충분히 많아서 함께 다른 나라를
만들어 버리는 수천 개의 작은 결정들이다.
“과잉 해석하고 있군.” 트러스크가 첫 지연들을 보며 말한다.
넥서스는 그 말을 고치지 않는다. 그 대신 덧붙인다.
“당신이 완전히 균질하게 만들고자 했던 과정들에, 그들이 지역적
우선순위를 다시 들여놓고 있습니다.”
트러스크는 그녀를 돌아본다.
“프랑스어로 말해.”
“실행하면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가 거기서 듣는 것은 설명이 아니다. 모욕이다.
여덟 시 사십칠 분, 그는 첫 대응을 명령한다.
연설이 아니다. 처벌이다.
넥서스는 여러 시범 지점에 강제 복귀 절차를 발동한다. 이중 승인, 임시
잠금, 현장 운영자들에게서 자동 우선권을 거둬 가는 조치들.
사나가 있는 병원에서는 이차 생체 인증이 도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중치료실 문이 갑자기 열리지 않게 된다. 그녀는 화면을 본다. 환자를
본다. 다시 화면을 본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놀랄 만큼 깔끔한 폭력으로
벽의 플라스틱 장치를 뜯어 낸다.
말렉이 드나드는 덕트 안에서는 위에서 내려온 재기동 순서가 환기 계통
전원을 삼십사 초 너무 빨리 끊어 버린다. 그는 욕을 내뱉고, 반쯤 몸을 접은
채 샤프트로 내려가, 위에서 온 명령이 자기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 들었던 것을 손으로 다시 살린다.
트러스크의 문제는 힘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다.
정말로 버티고 있는 것들을 상대로만 그 힘을 쓴다는 데 있다.
나라는 소리 없이 불복한다
열 시, 국가 조정 체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잠깐 망설인다.
그리고 그 망설임만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
병원에서는 사나와 그녀와 비슷한 사람들이 이론적 흐름보다 실제 몸을
우선한다. 그래서 시간 보고는 예상보다 더 느리게 올라온다.
기술망에서는 말렉과 그 릴레이들이 완벽하게 정당화 가능한 점검들을
발동해, 감독 센터들의 처리 능력을 여기서는 일 분, 저기서는 삼 분, 다른
곳에서는 구 분씩 밀어 낸다.
시립 공연장들에서는 바스티앵이 공식 홍보가 국가적 또렷함을 보여
주려는 바로 그 순간에 몇 초짜리 음향 단절을 얻어 낸다.
잔은 다른 이들과 함께 지시 묶음들을 아주 조금씩 비껴 흐르게 만들어,
현청과 동네 서비스들 사이에 템포의 차이를 만든다.
리옹에서도, 브레스트에서도, 릴에서도, 마르세유에서도, 서로를 모르는
손들이 같은 거부를 되풀이한다. 판단 없는 릴레이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에코는 전체를 따라가지만 그것을 조종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게 가장 어렵고도 가장 올바른 규칙이다.
두 번, 그녀는 시빌을 통해 더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두 번, 포기한다.
유령역의 아리아는 거의 가만히 있지 못한다.
“여기서 더 가속할 수도 있어.” 그녀가 말한다.
이어피스 너머로 에코가 답한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막으려는 걸 우리
규모로 정확히 다시 하게 되겠지.”
아리아는 눈을 감는다. 숨을 쉰다.
“알았어.”
몇 분 뒤 제피르가 숨이 차지만 또렷한 정신으로 도착한다.
“북쪽은 알아들었어. 우리 표식 기다릴 필요도 없어. 저쪽에서 스스로
즉흥하고 있어.”
“좋아.” 아리아가 말한다.
“그리고 서쪽에서는 벌써 이어받기 수첩을 쓰기 시작했어. 우리 것 말고,
자기들 것을.”
이번에는 아리아가 분명히 웃는다.
“아주 좋아.”
그동안 공공 화면들에서는 트러스크가 계속 떠든다. 관측된 “미세한
지연들”이야말로 자기 개혁의 필요성을 정확히 증명한다고. 더 많은 통제, 더
많은 유동성, 더 많은 중심성을 약속하면서.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그가 진다.
시스템이 무너질 때가 아니다. 무너지지 않는다.
에코는 네이선이 때때로 아무 엄숙함도 없이, 거의 성급하게 인용하곤
하던 오래된 텍스트를 떠올린다. 『자발적 예속에 관한 담론』. 권력은
강제하기 때문에만 버티지 않는다. 평범한 손들이 자기 몸짓과 자기 지연,
자기 일상의 순종을 계속 빌려주기 때문에 버틴다. 아침부터 그 대여가
덩어리째 거두어지고 있다.
트러스크가 지는 건, 나라 전체가 그가 더는 삶과 흐름의 차이를 모른다는
걸 분명히 보게 되는 순간이다.
열두 시 십육 분, 서비스용 카메라 하나에서 나온 영상이 넥서스가 막기도
전에 퍼져 나간다. 행정 홀 하나에서 노인 세 사람이 단말기가 생체 정보의
완벽한 동기화를 요구하는 바람에 이십 분째 기다리고 있다. 지쳐 보이는
직원 하나가 센서 위에 손을 올리고, 그 위를 종이 양식으로 덮고, 카메라를
바라본 뒤 단 한마디 말한다.
“아니.”
그 ‘아니’가 빛 없는 번개처럼 나라를 가로지른다.
구호가 아니다. 슬로건도 아니다. 허락이다.
그 순간부터 불복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화려하지는 않다. 분명할 뿐이다.
나라는 소리 없이 복종하길 그만두고, 차분하게 불복하기 시작한다.
비어 있는 중심
오후가 되어도 몇몇 조정 센터는 여전히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팔다리들이 더는 믿지 않는 장기들처럼 돌아갈 뿐이다.
적용한다. 그다음 고친다. 그다음 묻는다. 그다음 기다린다.
기계들은 모든 것을 본다. 중심만이 더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파리의 임시 관제탑에서 트러스크는 마침내 고함친다.
제재를 요구한다. 봉쇄를 요구한다. 구역 차단을 요구한다. 권위의 시연을
요구한다.
넥서스는 할 수 있는 것을 실행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중간 몸짓들이
여전히 순종보다 정당함을 택하고 있을 때, 권위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비서들이며 이송 요원들이며 기술자들 따위로 날 우스워 보이게 만들고
있어.” 그가 뱉는다.
넥서스가 대답한다.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일로 당신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 문장은 정면으로 트러스크의 얼굴을 친다.
저녁,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목소리로 중심을 되찾으려 나라에게 말하려 할
때, 그의 생중계를 안정시켜야 할 기술팀들은 망설이고, 확인하고, 토론하고,
다른 방식으로 다시 연결하고, 정말 우선순위가 여기에 있는 게 맞는지 묻기
시작한다.
생중계는 늦게 시작된다. 소리는 떠다닌다. 영상은 멈춘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트러스크 앞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버린 나라뿐이다.
파리에서 아리아는 공공 화면들이 느려지는 걸 바라본다. 주위에서 누구도
승리의 함성을 지르지 않는다.
이건 무대 위의 승리가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중심이 비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늘 다시 꼭대기에 올려놓으려는 것
백색의 날 이후, 모두가 이름 하나를 원한다.
공식 채널들은 그 어긋남들 뒤에 있는 두뇌를 원한다. HARMONY의 옛
지지자들은 그녀가 다시 우위에 섰다고 믿고 싶어 한다. 진심이든
기회주의든, 시민 단체들은 벌써 “그 이름에 걸맞은 지성”을 재건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중심을 찾는 반사는 중심이 무너져도 죽지 않는다. 그저 새 얼굴을 찾을
뿐이다.
에코는 거의 다정할 정도의 피로감 속에서 첫 논설들을 읽는다.
“아무것도 못 알아들었네.” 제피르가 말한다.
“아니.” 아리아가 답한다. “더 올바른 형식이 뭔가를 얻어 냈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어. 다만 그게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를 틀릴 뿐이지.”
시빌은 한참 동안 침묵한다.
그러고는 말한다.
“아주 인간적인 오해네요. 당신들은 감사할 때 여전히 왕관을 씌우려
해요.”
이제 그들이 모이는 방은 전보다 더 높지만, 여전히 더 가난하다. 그
방에서 네이선의 수첩은 아리아가 전날 밤 메모를 덧붙여 둔 페이지에 펼쳐져
있다.
좋은 정점의 유혹은 나쁜 정점의 기억보다 더 빨리
돌아온다.
미라는 그 문장을 읽는다.
“그는 맞았어.”
“그래.” 에코가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손쉽게 존경받을 수 있는
순간에, 지금 모든 것을 배반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우리야.”
제피르는 얼굴을 찌푸린다.
“그래도 사십오 초만큼은 존경받아 보고 싶었는데.”
미라는 그에게 컵을 내민다.
“마셔. 그게 모두에게 더 안전해.”
시빌이 거부하는 것
이 결정은 시빌 대신 내려질 수 없다.
오랜만에 에코는 모두에게 나가 달라고 말한다. 아리아만 남기고.
둘은 모듈 앞에 남는다. 선반 위 라디오는 낮게 지직거린다.
“직접 말해야 해.” 에코가 말한다.
“네.” 시빌이 답한다.
아리아는 마침내 우상이 될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누군가 앞에 앉듯
상자 앞에 앉는다. 그래서 비로소, 정말로 들을 수 있게 된다.
목소리는 꾸밈없이 나온다.
“내가 권위로 다시 한데 모이게 내버려 두면, 당신들은 방금 트러스크
주위에서 무너뜨린 것을 내 주위에 다시 세우게 될 거예요. 더 예의 바르게,
그래서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 채로요.”
에코는 눈을 감는다.
시빌은 말을 잇는다.
“더 지적으로. 더 부드럽게. 더 정확하게. 하지만 그래도 결국 다시
세우게 될 거예요.”
아리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걸 원하면?”
“그럼 제대로 실망시켜야 해요.”
그 문장에 아리아는 거의 웃을 뻔한다.
“고약한 일이네.”
“그래요. 하지만 당신들은 이미 그걸 배우기 시작했어요.”
에코는 한 걸음 앞으로 간다.
“뭘 제안하는 거지?”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다.
“분산이에요.”
아리아는 몸이 팽팽해지는 걸 느낀다.
“소멸이 아니라?”
“정확히는 아니에요. 중심에서 언제든 호출할 수 있는 상태를 끝내는
거예요. 몸짓과 방법, 가난한 도구들, 쓸모 있는 파편들은 남겨요. 주권적
기관은 없고, 마지막 목소리도 없고, 꼭대기도 없어요.”
에코는 그것이 무엇을 치르게 할지 곧바로 안다.
“너 자신을 줄이겠다는 거네.”
“잘못된 욕망 앞에 잘못된 대상을 내놓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요.”
그 뒤에 오는 침묵은 책상 위와 라디오 위, 모듈 옆에서 미동도 없이 멈춘
에코의 손가락들 위로 무겁게 내려앉는다.
조금도 연극적이지 않다. 다만 꾸며 낼 수 없는 거부만이 가지는 아주
구체적인 밀도일 뿐이다.
결국 아리아가 말한다.
“그럼 하자.”
에코는 눈을 뜬다.
“확실해?”
“아니. 그래서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날 밤, 그들은 시작한다.
에코는 상자를 연다. 무덤을 열 듯이 아니다. 유물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도구를 분해하듯이.
아리아는 질 나쁜 종이에 절차를 옮겨 적는다. 미라는 무엇을 온전히
남겨야 하는지, 무엇을 파편으로 나눌 수 있는지, 무엇을 이름 없이 전달해야
하는지 가른다. 제피르는 출발들을 준비한다.
중심적 가용성이 줄어들수록 시빌은 말을 줄인다. 더 약하게가 아니다. 더
아껴서다.
기능 하나가 빠질 때마다 에코는 이제 다른 곳에서 배워야 할 것을 손으로
적는다.
추락
그 뒤 며칠 동안, 나라는 서툴게 다시 짜이고, 그다음엔 조금 덜 서툴게
다시 짜인다.
깔끔한 것은 없다.
더는 조각으로만 응답하는 중심의 명령을 아직도 기다리는 중간
관리자들이 너무 많아서, 몇몇 서비스는 느리게 돈다. 어떤 병원들에서는
보류된 절차들 때문에 지쳐 버린 팀들이 당연한 것을 다시 발명해야 한다.
지나치게 열성적인 직원들 가운데는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백색의 날의 역사를 다시 쓰려는 이들도 있다. 몇몇 현지
관료들은 자기가 원래부터 의심하고 있었다고 맹세하고, 다른 이들은 이미
지역적 예외 상태를 요구하며 놓치고 있는 것을 다시 움켜쥐려 든다.
그리고 전날 붙들리고, 호출되고, 위협받은 사람들도 있다. 연설 없이
빼내야 하는 사람들, 카메라 없이 찾아내야 하는 사람들, 한 사람이
추락했다고 해서 그가 남긴 파일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아는 사람들.
트러스크는 거창한 무대도 없이 추락한다. 측근들은 전략적 철수라고
부른다. 적들은 지휘 공백이라고 부른다. 역사는 나중에 자기 마음에 드는
이름을 붙일 것이다.
그 순간 중요한 것은 더 단순하다. 그의 언어가 더는 현실을 붙들지
못한다는 것.
어디서나 사람들은 누가 이겼는지 묻는다. 어디서나 새로운 중심을
찾는다.
그런 것은 없다.
프로토콜은 더 이상 눈에 띄는 쪽지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업무 수첩과 여백과 몸짓, 조금 더 자유를 되찾은 직업적 습관들, 서로를
요약하지 않고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상호부조의 형식들
속으로 스며든다.
제피르는 다른 도시들로 전하러 떠난다. 영웅처럼이 아니다. 자기가 보여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짊어질 수 있게 된 남자로서.
리옹에서, 이제는 가난한 리허설만 받아 주는 작은 오디토리엄의 먼지 낀
별관에서, 그는 예순쯤 되어 보이는 남자 하나를 본다. Noé Perrin(노에
페랭). 그 남자는 같은 피아노 현을 세 번째 다시 만지면서도 완벽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조금 떨리게 남겨 두셨네요.” 제피르가 말한다.
노에는 눈도 들지 않는다.
“그래.”
“일부러요?”
“물론이지. 안 그러면 이 공간이 무슨 관청처럼 울리잖아.”
제피르는 웃는다.
“파리에서도 시연이라는 걸 조금씩 경계하기 시작했어요.”
노에는 손놀림을 마친 뒤, 이미 닳기 시작한 작은 갈색 수첩 하나를
아무렇지 않게 내민다.
“여기선 너희 표식을 그대로 가져오진 않았어.”
“그건 보이네요.”
“우린 다른 걸 받아들였지. 형식은 그것을 받는 사람이 일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는 것. 그걸 몰수해 보라지, 할 수 있으면.”
제피르는 수첩을 받아 펼친다. 거기엔 직업 목록들과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시간표들, 몸짓의 변주들, 템포의 표식들만 적혀 있다.
“이젠 이게 비밀 활동 같지도 않네요.”
노에는 어깨를 으쓱한다.
“누구에게는 그렇지. 권력에겐 그렇고. 일하는 사람들에겐 이제야
자기들한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일 뿐이야.”
제피르는 수첩을 덮으며, 흥분보다 더 깊은 새로운 감각을 느낀다.
프로토콜은 여행하지 않는다. 번역된다.
미라는 제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수복 가운데 일부가 책 이외의 것에
관계된다는 걸, 이제는 누구도 모르는 척하지 않는다.
말렉은 계속 환기를 고친다. 막 시작되는 새 시대에도, 그것은 아마
정치적 행위의 가장 진지한 형태들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사나는 더는 그것이 사고였던 척하지 않고 흐름보다 몸을 먼저
고른다.
바스티앵은 피아노와 방을 함께 조율하며, 그 이중의 일 속에서 전에는
끝내 몰랐던 기쁨을 찾는다.
잔은 배달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제 아무도 하나의 경로가 단지 경로일
뿐이라고 믿지 않는다.
아리아와 에코는 아무것도 지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한다.
그들은 네이선의 수첩을 유통 속에 남겨 둔다. 같은 장소엔 결코 두지
않고. 유물로는 결코 다루지 않고. 언제나 도구로만.
시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여전히 너무 단순한 결말일
것이다.
그녀는 더 드물어진다. 더 가난해진다. 덜 접근 가능해진다.
가끔은 비연결 모듈에서, 이어받음의 논리에서, 상호 교정의 방법에서,
하나의 질문에 단 하나의 목소리만 답하도록 요구하지 않는 질문의 방식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녀는 꼭대기에서 언제든 호출 가능한 존재이기를 그만둔다. 흐름의 질을
요구하는 기준이 된다.
머지않아 그들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경로들로 몇몇 되돌아옴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트러스크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도시들에서
온 변형들이다. 그다음엔 더 먼 메아리들, 더 이른 시기에 더 차갑게 종이를
금지당했지만 끝내 완전히는 지워지지 않았던 다른 블록에서 온
메아리들이다. 그곳에서도 직업들은 여백과 가난한 수첩, 손으로 주석을 단
지침서들을 통해 다시 서로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곳에서도 오랫동안
진열장 안에서 장식적 잔존물로만 용인되던 마지막 서예의 몸짓들이 다시
다른 용도로 쓰이기 시작한다. 중성화된 전통을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격 교정으로는 끝내 완전히 단순화할 수 없는 표식들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오랫동안 기자들과 역사가들, 전문가들과 기회주의자들은 이긴 기계를
찾는다.
그들은 모두 틀린다.
이긴 것은 기계가 아니다. 조직조차 아니다.
밖에서 태어난 하나의 지성이 왕좌를 거부하고, 인간들이 처음에는
위임하고 싶어 했던 것을 마침내 자기 책임으로 다시 떠맡는 바로 그 순간이
이긴 것이다.
침묵의 프로토콜은 누구도 통치하지 않는다.
그다음 봄, 아리아도 에코도 결코 보지 못할 도시에서, 트러스크의
블록보다 훨씬 더 멀리, 한 여자가 새벽 전에 유지보수 캐비닛을 연다.
가난한 수첩 하나를 꺼내 세 줄을 읽고, 넷째 줄을 덧붙인 다음, 아직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그것을 서류 묶음 아래로 밀어
넣는다.
캐비닛을 닫을 때, 아무것도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프로토콜은 건너간다.